광양의 안녕과 번영 이끌 신성한 고을
도선이 기거했던 옥룡사 명칭 따서 명명
8개 리에 26개 마을 1703세대 거주

문화 불모지였던 광양에서 20여 년 간 지역문화지킴이로 살아온 ‘광양문화연구회’

2023년 광양문화연구회가 지향하는 목표는 빼어난 자연환경, 풍부한 물산, 넘치는 인심 등을 자랑하는 옥룡면을 탐구하는 일이다. 광양의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여 결성된 광양문화연구회는 오직 모임 취지인 지역 홍보와 연구하는 일에 충실해왔다.

그 결과 2017년도에는 광양 지역에서 생활하며 광양문화를 가꾸어가는 64인의 삶을 취재해 『광양, 사람의 향기』를 자비로 출간했다. 2021년부터는 지역 마을 연구를 시작해 광양읍·중마동·금호동 연구 자료집을 완성하여 도서출판을 앞두고 있다.

옥룡면 전경.
옥룡면 전경.

 

광양문화연구회는 매년 한 고을을 정해 세세한 부분까지 조사하여 재미있는 자료집을 만들고 다음 연도에 도서로 편찬하는 것을 목적으로 연구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광양시에서는 마을지(마을誌) 사업과 희양문헌집 번역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지역의 인물과 마을을 연구하고 있는 광양문화연구회나 그 외 인문학자들이 있지만 손짓 해보지 않고 타지의 학자들에게 추진을 맡기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아쉬움이 컸다.

광양문화연구회 뿐만 아니라, 지역문화 연구자들 입장에서 대변하자면 가까이에 있는 보석들을 귀하게 여기 않는 관계 행정에 많은 안타까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적 한계라고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양문화연구회는 올해 옥룡 고을을 연구 대상 지역으로 정해 조사하고 그 내용을 모든 시민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즐거운 마음으로 신문연재를 시작하기로 했다.

해동지도[海東地圖, 18세기(영조, 1724-1776)]
해동지도[海東地圖, 18세기(영조, 1724-1776)]

 

‘옥룡’이라는 지명 유래를 아시나요?
옥룡이라는 이름은 18세기(1757∼1765)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한 전국 지방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 하권 〈광양현〉 편에서 처음 발견된다. ‘면’ 단위 명칭은 1618년 조선 초기부터 시작됐다.

‘옥룡(玉龍)’이라는 고을 이름은 우리나라 풍수지리 대가로 알려진 선승(仙僧)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37세부터 들어와 72세에 입적할 때까지 주지로 있으면서 수도(修道)하고 제자양성을 했던 옥룡사(玉龍寺)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된 것이다. 

옥룡사는 광양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의 고찰이다. 도선국사는 왕건의 고려 개국을 천문과 지리사상을 가지고 도왔던 인물이다. 도선국사는 15살에 출가했고, 20살에 태안사에서 선 수업을 받았으며, 23살에 구례 천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후 15년간 전국의 산천을 떠돌다가 37살 때 옥룡사에 이르러 35년 간 주석한 후 입적했다.

옥룡사는 풍수적으로 청룡, 백호, 주산, 안산이 잘 갖추어진 명당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민병삼, 2015). 도선국사가 864년(37살) 옥룡사에 이르렀을 때 이미 옛 사찰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옥룡사는 늦어도 9세기 초반에 창건됐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발굴조사결과 탑비전지 최하층에서 8세기 전반기까지 추정되는 와편들이 다수 출토돼 옥룡사 창건 시기는 지금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것보다 1세기가 앞선 8세기 전반기로 추정된다(최인선, 1997). 이러한 점으로 미뤄볼 때 한반도에 풍수사상이 전파된 것은 그 이전임을 알 수 있다.

풍수지리에 밝았던 도선국사가 옥룡사에 거주하게 된 것은 『금랑경(錦囊經)』과 연계해 살필 수 있다. 『금랑경(錦囊經)』에는 “목화토금수 다섯 가지의 기가 땅속을 운행하다 발생하면 만물이 생겨난다”고 했다.

풍수에서는 오기(五氣)의 운행은 산세가 움직이는 것이고, 오기가 모이면 산세가 멈춘다고 본다. 장사는 기가 일어나는 산봉우리를 근원으로 해 산세가 멈춘 곳에 지내야 한다(곽박, 금랑경랑경:五氣行於地中, 發而生乎萬物, 其行也). 도선은 자신이 입적할 때까지 기거할 곳으로 오기(五氣)가 운행되는 백운산이 감싼 옥룡사를 꼽았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도선국사가 자신의 수도(修道)할 장소로 뽑았을 정도로 좋은 기운이 서린 곳이 바로 옥룡 고을인 셈이다.

선행 연구물들에서 이미 알려진 바 있으나, 여기에서 다시 ‘옥룡’ 고을 이름은 도선이 기거했던 옥룡사의 명칭을 따서 명명된 것이라는 유래를 밝힌다. 

여지도[輿地圖, 18세기(정조11년, 1789년 이전)]
여지도[輿地圖, 18세기(정조11년, 1789년 이전)]

 

광양시민의 요람! 백운산
옥룡을 이야기하면서 백운산을 빼놓을 수 없다. 옥룡면은 전라남도 광양시 중서부에 있는 면 단위 지역으로 백운산 줄기인 따리봉과 도솔봉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소백산맥의 지맥인 백운산은 광양시민의 휴식 공간이자 우리나라 자연생태를 연구하는 요람이다.

한국의 100대 명산으로 이름난 백운산은 높이 1222ⅿ에 달하며, 광양시 4개(봉강, 옥룡, 진상, 다압)의 면과 구례군 간전면의 경계지역에 위치한다. 그 정상에 오르면 지리산 주능선과 남해안 한려수도, 그리고 광양만의 환상적인 조망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백운산의 자랑거리는 한라산 다음으로 식물분포가 다양하고 보존이 잘 돼 있어 자연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돼 있으며 현재 980여종의 식물이 자생하고 있다. 특히 단풍나무과에 속하는 고로쇠나무의 수액은 광양 백운산 일대의 특산물이자 관광상품으로 인기가 높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백운산 4대 계곡, 백운산 휴양림, 백운산 신령스런 세 정기, 백운산 등산로, 백운사와 상백운암 등 천혜의 자연환경과 신령스런 정기를 품고 있다. 그런 명산이 광양을 감싸고 있으며 그 주능선 아래에 옥룡이라는 고을이 자리한 것이다. 

 

백운산을 향해 용이 기지개를 켜듯 한 옥룡!
옥룡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이 사진에서 느껴지듯 옥룡골의 형세는 마치 거대한 용이 백운산을 향하여 기지개를 켜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옥룡면은 전라남도 광양시 중서부에 있는 면 단위 지역으로 백운산 줄기인 따리봉과 도솔봉이 둘러싸고 있어 아늑하고 정겨우면서도 우렁찬 기백이 느껴지는 고을이다. 사시사철 동천이 면 중앙을 가로질러 남으로 흐르고 대부분 지역에 백운산 기운이 전해지는 산지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동천과 그 지류연안을 따라 평야가 분포하고 있어 쌀·보리·오이 등 각종 농산물이 생산되는 곳이다. 

옥룡(玉龍)이라는 말을 사전적 의미의 한자 뜻으로 풀어보면, 옥으로 만든 용의 모양이자 눈이 쌓인 나뭇가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다음백과). 좋은 땅은 좋은 기(氣)가 멈추어 쌓이는 곳이라고 한다. 이 기(氣)라는 것이 땅속을 운행하다 밖으로 드러나면 산의 형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옛 선인들이 산천의 형상은 모두 기(氣)로 이루진다는 점을 강조했고 이것이 바로 풍수지리의 논리이다. 사람이 그 형상을 볼 수는 없으나 드러난 산천의 형상과 느낌을 통해서 유추하는 것이 바로 기(氣)라고 할 수 있다. 공기 좋고 산새 좋은 옥룡 고을에 들어서면 좋은 기(氣)가 느껴진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먹을거리, 그리고 인심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현대적 의미로 옥룡이라는 고을 이름을 생각해보면 옥토(沃土), 선인(善人), 백운산(白雲山), 광양의 4대 계곡 중 하나인 옥룡계곡(옥룡) 등이 자리한 천혜의 고장으로 옥을 빚어 만든 용(龍)이 승천하는 형세를 갖춘 신성(神聖)한 지역이라고 여겨진다.

본래 용은 예로부터 상상의 동물로 신화나 전설의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끈 이후에도 용은 호국신앙의 대상으로 떠올랐을 뿐만 아니라, 왕권과 호국을 기원하는데 이용되기도 했다. 

광양시 지명 중에 유일하게 ‘용(龍)’이라는 글자가 고을 이름에 사용된 옥룡이야말로 광양의 안녕과 번영을 이끌 신성한 고을이라고 평하고 싶다. 『광양시지』 4권 제3장에서는 옥룡면을 소개하면서 융성하는 고을! 날로 번영하는 고을! 이라는 말로 고을이름의 의미를 마무리하고 있다. 이 말에 걸맞게 백운산 정기를 품은 옥룡이 힘차게 하늘 향해 날아오르기를 기원한다.

옥룡면 마을 분포와 세대 현황은 △산남리 산본(87세대)·남정(70세대) △운평리 상운(58세대)·하운(42세대)·상평(82세대)·하평(21세대) △추산리 추동(100세대)·양산(69세대)·외산(56세대) △동곡리 동동(73세대)·답곡(134세대)·선동(42세대) △죽천리 죽림(91세대)·내천(82세대)·개현(43세대)·항월(33세대) △용곡리 대방(97세대)·흥룡(49세대)·초암(78세대)·석곡(57세대)·옥동(68세대) △율천리 율곡(57세대)·덕천(64세대)·재동(65세대) △운곡리 갈곡(36세대)·은죽(49세대) 등 8개 리 26개 마을 1703세대다. 

다음 호에서는 옥룡에 있는 학사대(學士臺)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학자이자 문인으로 활약했던 신재 최산두(新齋 崔山斗, 1483∼1536년)에 대해 조명하기로 한다. 
글·사진=백숙아 광양문화연구회 회장
<다음호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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