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 계속>

학사대로 가는 길
옥룡은 들어가는 입구부터 계곡이 이어져서 사시사철 물 흐르는 소리와 주변 숲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새소리, 그리고 자연풍경이 어우러져 지날 때마다 여유롭고 평화로운 기분으로 심신의 안정을 찾게 된다. 

고속도로 광양톨게이트를 빠져나와서 곧장 우회전하여 옥룡 초입에 들어서면 ‘신재로’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도로명이 맨 처음 만들어지던 시기에 필자는 광양시 첫 여성 지명위원으로 참석하여 ‘신재로’라는 이름을 제안하였고 다행히 채택되어 지금까지 쓰이고 있어 볼 때마다 반갑고 정겹다. 
 

백운산 봉바위
백운산 봉바위

 

백운산 봉바위(鳳巖)
백운산 도솔봉에서 내려오자면 북쪽에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아준다는 봉바위가 반긴다. 그 자태가 우아하고 아름다워 백운산을 찾는 이들에게 좋은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게 한다. 그 기운 탓인지 백운산 아래에 위치한 옥룡과 그 주변 고을에서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백운산 세 가지 정기(봉황, 여우, 돼지) 중 봉황의 정기를 타고 났다는 신재 최산두(新齋 崔山斗, 1482~1496)는 광양시 봉강면 부저리에서 태어났으며 옥룡에 위치한 학사대에서 학문을 완성했다.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성리학을 남도에 뿌리내린 최산두가 바로 봉바위(鳳巖) 기슭에서 공부하여 호당(湖堂: 조선시대에 국가의 중요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하여 건립한 전문 독서연구기구)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학사대
학사대

 

옥룡을 빛낸 인물 1호 
봉황의 정기 타고난 신재 최산두

최산두의 어머니가 그를 낳던 때에 북두칠성 정기가 백운산에서 내렸다는 이유로 ‘산두(山斗)’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는 인물이 빼어났을 뿐만 아니라, 뼈대가 크고 몸이 건장하여 호걸스럽다는 평을 들었다. 그의 후손 2백여 명의 모습을 참고하여 제작된 초상화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이렇게 호걸스러운 외모를 지닌 탓이었을까? 그는 학문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담대하고 거침없었다. 15세 되던 해에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80권을 안고 석굴에 들어갔을 정도이니 얼마나 용감하고 집념이 강했을지 짐작이 되지 않는가? 15세이면 요즈음 중학교 2학년 나이이다. 학원에 오가는 것도 부모님들이 자가용으로 픽업해주는 요즈음 청소년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 않던가.
 

최산두가 공부했던 석굴
최산두가 공부했던 석굴

 

조선시대에는 백운산에 호랑이·여우·노루·곰·산돼지 등 인간의 안전을 위협하는 짐승들이 살았을 것이다. 실례로 다압면 고을 산중턱 쪽에 살았던 어르신 한 분이 젊었을 적에 호랑이가 집에까지 내려온 적이 있어서 밤이면 요강단지를 방에 놓고 일을 봤을 정도라고 했다. 

학사대가 있는 곳은 지금도 인적이 드문 곳이지만 조선시대엔 개미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15세의 나이에 그런 험지를 찾아들어가 학문을 완성하였다니 배움에 대한 열정과 집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된다. 어린 최산두는 학문에 열중하다가 때로는 다람쥐랑 이야기를 나누고 사계절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며 계곡의 물소리에 맞춰 노래도 하였을 것이다. 

한편 이 시기는 최산두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사림의 종장으로 추앙받던 김종직의 애제자인 김굉필을 만난 때이기 때문이다. 최산두가 혼자 독학하며 고뇌하던 시기에 때맞춰 김굉필이 순천 북문 근처로 유배를 왔던 것이다. 그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스승으로 삼고 찾아다니며 더욱 깊은 학문연구에 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윤선도의 증조부 윤구(尹衢)와 유희춘의 형 유성춘(柳成春)과 더불어 명실공히 ‘호남삼걸(湖南三傑)’로 일컬어졌다. 정치가이자 문장가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이란 역사적 인물로 남게 되기까지의 기틀을 잡아주고 그의 학문세계가 완성된 시기인 셈이다. 
 

월애부인 집터
월애부인 집터

 

그 결과 호남의 큰 유학자로 일컬어지는 장성의 하서 김인후와 담양의 미암 유희춘 등 훌륭한 제자들을 배출하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가 잠을 자고 책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협소한 석굴 안에서 10년을 채워 학문을 완성했다는 최산두! 지금도 그때 그 모습으로 남아있는 석굴을 찾아가 최산두의 5백여 년 후학으로서 선비 정신을 새기며 바위 속에 앉아보았다. 지금도 추운데 무명옷으로 솜옷을 지어 입고 살았던 조선시대의 겨울은 얼마나 추웠을 지를 생각해보면서. 봄인데도 아직 기온이 차고 습이 가득했으나 최산두가 공부했던 장소에 앉아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조선시대 학자가 된 것처럼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이었다. 

최산두는 화순 동복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유배 생활 하는 동안 많은 제자들이 찾아와 시창작과 학문을 익혔다. 최산두는 틈날 때마다 화순의 물염과 적벽을 오가며 환상적인 풍광에 젖어 시를 지어 읊었다고 한다. 최산두가 이때 지었다는 ‘화순 적벽’은 현재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정작 최산두가 태어나 성장한 광양에서는 그를 기리며 기념하고 연구할 수 있는 방향이 닫힌 실정이다. 하루 빨리 지자체와 관련 연구자들이 합심하여 최산두를 기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화순과 순천을 연계하여 관광 코스로 개발되길 기대한다. 

현재 최산두는 1578년 세워진 광양읍 우산리에 자리한 ‘봉양사(鳳陽祠)’와 화순 동복에 위치한 ‘도원서원(道源書院)’에서 배향하고 있다.

이곳이 월애부인 집터?
학사대에서 내려오는 길에 월애의 고향으로 불리는 월애촌을 찾아갔다. 백운산 세 정기 중 여우의 정기를 타고 난 월애를 상상하면서.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두 부부가 밭일을 하다가 반겨주었다. 아내 분이 유독 반갑게 맞아주었다. ‘월애 부인을 아시나요?’라고 물었더니 ‘들었어요.’라고 답하는 것이다. 반가웠다.

그리고 자신의 집으로 안내하더니 답사하느라 힘들어 목말랐던 걸 눈치라도 챈 듯 수박을 내놓았다. 그리곤 다짜고짜 ‘저희 집에 월애 부인이 살았던 것 같아요. 진짜라니까요.’라고 단언적으로 말했다. 이야기를 이어가다보니 광양의 국악 4남매들의 어머니였다. 

그때부터 네 아이들 이야기와 왜 자신의 집을 월애가 살던 집이라고 말하는 지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자신의 네 자식들이 이 집에서 예술적인 기를 갖고 태어나 잘 자라서 활동하고 있으며 자신의 당찬 열정이 월애부인과 닮았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과학적으로 고증된 바 없지만 당당하고 진솔한 그녀의 성품이 왠지 월애부인과 닮은 듯하다.

지혜로운 여우의 정기를 타고 난 월애는 어려서부터 행동이 조신하고 그 자태가 빼어나 ‘화용월태(花容月態)요, 군방지란(群方之蘭)’이라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빼어난 용모 탓이었던지 몽고에 공녀로 잡혀간 월애에게 빠진 몽고 왕은 상당한 세력을 그녀에게 부여 해주었다고 한다. 덕분에 고려 조정에서 몽고에 청탁을 하려면 월애를 통하였다고 하니 그의 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이 된다. 월애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본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큰데다 지혜롭기까지 하여 고려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백운산 세 정기 중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은 돼지의 정기를 이을 사람이다. 가끔은 광양제철소를 지목하거나 광양에 거주하는 모 사장님을 칭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개인의 재산을 함부로 측정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기업을 백운산 신령한 부의 상징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최산두와 월애부인을 생각하면 돼지의 정기도 개인이 타고 나야 될 것 같아서이다. 

총명함, 아름다움, 부 등의 정기를 모두 품고 있는 백운산의 세 정기!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오묘할 뿐만 아니라, 아직 나타나지 않은 돼지의 정기에 대해 솔깃해지는 현대인들의 설렘. 전설일 뿐이라며 실망하지 말고 백운산에서 받을 수 있는 돼지의 기운을 타고 날 사람이 누구일지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글·사진=백숙아 광양문화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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