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산책

마을 전체가 절터
율곡은 밤실이라고 불린다. 밤이 많이 열리는 마을, 밤나무가 많은 마을이라서 그렇게 부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밤은 제사에 꼭 필요하며 신주위패(神主位牌)를 모실 때도 밤나무가 유용하므로 여러 과일 중 밤을 택해 율곡이라 불렀다고 광양시지(2005)에 기록돼 있다. 

율곡마을 전경

유래야 어쨌든 광양읍에 살던 필자가 중학생 때 옥룡에서 온 친구들을 통해 밤실이라는 말을 처음 듣게 되었는데 얼마나 예쁘게 들렸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밤실에 꼭 가보리라 생각만 하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고 몇 년 훌쩍 지난 후 논실 마을에 살던 친구가 밤실로 시집을 가게 됐다. 친구는 밤실 댁이 되었지만, 밤과는 전혀 상관없는 생업에 바빠 필자도 밤실에 몇 번 가보지 못했다. 

그 기억 속의 예쁜 밤실을 취재차 찾아가는데 네비게이션이 잘못되었나 의심이 들 정도로 마을이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마을이 끝난 것 같은 둑의 외길을 몇 구비 꼬불꼬불 지나 드디어 당산나무가 커다란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과 인접한 마을 회관에 들어서니 추석 명절 전이라서 그런지 몇 분 안 계셨다. 통화했던 이장님마저 출타 중이시고 명절 준비를 하느라 늘 나왔던 어르신들도 안 나왔다고 하셨다. 

율곡마을 회관

마을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려면 100세가 넘거나 조예가 깊은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다 돌아가셔서 말해 줄 게 별로 없다고들 하셨다. 그러면 살아오신 이야기 해달라고 했더니 “우리 마을이 절터였당께” 하고 장영윤 어르신(84세)이 먼저 운을 떼셨다. 율곡 마을은 큰 절터라서 옴팍하고 터가 좋은 명당이라고 한다. 

“거센 태풍이 와도 산사태 일어날 일 없고 홍수 날 일 없어. 청룡산이 감싸 안아서 안전한 마을이여” 
마을 뒤 제일 높은 산봉우리가 두리봉인데 좌청룡에 해당하며 동북쪽에 있는 산은 매봉이라 불리는데 우백호에 해당한다. 매의 형국이라 매봉으로 불린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마을 전체가 둥글고 안온해 보이는 이유가 청룡이 감싸 안은 형국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율곡마을 장영옥 이장님

“우리 마실같이 한 군데 모닥모닥 모여 사는 동네가 드물제. 지금은 저기 삼거리에서 한 길로 뺑 둘러가면 다시 돌아 나올 수 있게 되었는디 참 터는 잘 잡았당께. 다른 마실에 가 보면 몬당에도 살고 산등성에도 살고 띄엄띄엄 얄라궂은 데도 살고 허는디 우리 마을은 반반하니 아담하니 터가 좋아”

동네 입구 장씨 제각 부근을 대문안 거리라 하여 절의 일주문이 있었던 곳으로 전한다. 바랑골, 당사골, 불당, 삼굿도랑, 웃당제골, 아랫당제골 등 율곡은 절과 관련된 명칭이 많다. 광양 시지(2005)에 의하면 거대한 주춧돌이 남아있고 다량의 기와가 출토됐다고 하는데 거기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마을길을 정비하느라 어릴 때 올라가 놀던 지석묘도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나이 80 이짝 저짝인 우리 같은 사람의 기억 속에만 있으니께”

율곡 마을은 사실 청동기 시대 지석묘가 있었다고 확인되어 마을 연혁이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광양은 전반적으로 여러 군데서 기왓장이나 토기가 출토되고 지석묘군이 남아있으니 율곡 마을의 지석묘는 그다지 희소성을 갖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화재를 잘 보존하는 일은 후손들에게 남겨 줄 정신적 가치의 현주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확인할 수 없는 아쉬움이 컸다.

율곡마을 이야기를 들려주신 어르신들. 왼쪽부터 배경두 씨(80세), 장경식 씨(79세), 장영윤 씨(84세)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마을 
“우리 시조 할아버지가 장씨였는디 임진왜란 때 경상도에서 요리로 피난을 와 가지고 장씨 집성촌이 되었제. 그때 저 당산나무를 심었다는 말이 있는디 말하자믄 400년도 넘었제. 어릴 때는 그네를 매어 놀았구만”

약 480년 전 순천 장씨가 처음 입촌해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하고 있고 현재도 장씨가 많이 살고 있다. 주차장을 만들고 정자를 지으면서 곁가지와 주변의 몇 그루를 베어 버려서 풍성한 맛이 없고 볼품없어졌다는 당산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된 1982년 기준으로 400년 된 느티나무다. 

마을의 옛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2년 전 마을 길을 정비하면서 많던 돌담을 허물고 새로 만든 담벼락에 벽화도 그려 새로운 마을이 됐다.

“마을 길을 새로 내기 전에는 돌담으로 이어진 골목이 많아서 엿을 들고 냅다 도망치면 엿장수가 잡도 못해. 이 구녕으로 쫓아가면 저 구녕으로 달아나고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엿장수도 길을 잃고 도저히 못 잡았당께”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추억 속의 마을 풍경을 그리워하는 듯 어르신들 모두 허허허 웃으면서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남아있는 돌담길

마을 길이 정비되기 전 돌담이었을 때는 택시도 안 들어오려 했고 트럭은 더구나 들어오기 어려웠다고 한다. 장경식 어르신(79세)은 언젠가 추석에 고향에 올 때 차 앞뒤 문짝을 담 모퉁이에 긁혔는데 설에 오면서 똑같은 그 자리를 또 긁혔다고 웃으신다. 지금도 불거진 그 모퉁이가 그대로 있다. 

편안한 고향, 2차선의 숙원
“출세하려면 도시로 나가야 허는디 그 뭐냐 쌍둥이가 있었어. 장선식이, 장정식이 쌍둥이 둘 다 고시 합격해서 출세를 했고 장일홍이라고 심계원 감사를 했고 박주호가 교육부 계장을 지냈제. 장보식이라는 사람은 변호사여. 장영일이라는 사람도 박사학위 따고 서울대를 졸업했고…”

 “우리 둘이는 객지에 나가 살다 63년 만에 들어왔으니 뭘 잘 몰러”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도시에 나가 고시 합격하고 박사학위 따고 윗집 장샌 아들은 출세해서 미국 가서 살고 있고, 이렇게 인재가 많이 난 마을이라고 자랑하셨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장경식 어르신과 배경두 어르신(80세)은 문득 고향에 돌아온 이유를 풀어 놓았다. 다른 큰 이유는 없고 내 집이니까 돌아왔단다. 노후는 고향에서 편안하게 살아야 한다고.

“옛날에는 사람 살기가 좋았제. 나무 연료 흔하제, 농사지을 때는 풀을 많이 뜯어 쓸 수 있어서 많은 사람이 들어와서 살았어. 그때 한 85호 이상 살았을 거여. 그래농께로 우리 동네가 옥룡에서 두 번째로 큰 동네였제. 근디 교통이 불편항께 교통 좋은 디로 나가불고 우리 동네가 요새는 그리 큰 동네가 아녀. 지금은 한 4~50호 될랑가” (2023년 7월 31일 기준으로 인구 현황을 살펴보면 57세대가 살고 있다)

사람들이 마을에 들어와 살지 않는 이유는 첫 번째로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마을이 발전하려면 2차선이 얼른 나야 한다고, 덕천까지는 2차선이 났는데 우리 마을은 참으로 오고 가기 힘든 외길이라고 했다. 마을로 들어오면서 여기 마을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외길 끝에 있으니 불편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 같다. 

“현재 복개 공사를 하고 있는디 암튼 2차선이 나야 버스가 올라오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제. 자가용이 다 있응께 옛날같이 버스 타러 쩌 밑에 까정 안 가도 되지만 이사 올 때 트럭을 거꾸로 해서 뒷꽁무니부터 올라왔당께. 돌지를 못허니께 나갈 때를 생각해서 그랬제. 지금은 주차장도 생겨서 좋제”
주차장에 서 있는 당산나무에도 당산제를 지냈을 거라고 추측하는 필자에게 기우제 지낸 바위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쩌 뒷산에 쇠보탕(쇠바탕)이라는 곳이 있는디 마당처럼 넓고 평평해서 소를 거기따 놓아 풀을 먹였어. 그 곁에 산제당이 있는디 큰 바위라. 비가 안 오면 기우제를 지내서 비가 오고 했당게”
“제가 가볼 수 있을까요?”
“못 가 못 가. 길도 없고 갈 수 없어. 가다가 힘등께 죽을지도 몰러”
길이 없어 못 간다고 손사래를 치시는데 정말 확인할 수 있는 건 돌담밖에 없었다.
삼거리라고 불리는 곳에서부터 골목을 따라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돌담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시멘트 담으로 단장한 곳이 여러 군데 눈에 띄었다. 담장에는 벽화가 멋지게 그려져 있었다. 

잘 정비된 골목길

마을의 주 농사는 감, 밤, 매실, 고사리, 벼농사이다. 감나무가 산밑을 둘러 마을을 감싸고 매실나무는 하천 쪽을 둘러 마을을 보호하고 있다. 산과 나무들이 마을을 둘러 안고 있는 정말 옴팍하고 아늑한 마을이다.
정자 지붕 위에 낙엽을 떨구고 있는 당산나무가 있는 주차장으로 나왔다. 마을에 올 때의 기대와는 달리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율곡 마을의 역사를 눈으로 볼 수 없음이 여전히 아쉬웠다. 지석묘나 대문안 거리, 절터, 주춧돌 등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어르신들의 마음에 남아있는 마을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하며 율곡 마을을 떠났다. 

도중에 마을로 들어오는 차를 만날까 봐 걱정하면서 필자도 2차선 도로가 생기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살고, 터가 좋은 만큼 살기도 좋아지고, 추억 속의 예쁜 밤실이 나날이 더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글·사진=박옥경 광양문화연구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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