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고속도로를 지나다 보면 주암을 지나 곡성군 석곡면이 나온다. 우리 고장 옥룡에도 석곡마을이 있다는 걸 이번 취재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광양읍 출신이라서 봉강이나 옥룡은 한동네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한때는 토요일마다 백운산 둘레길을 한 바퀴 돌았고, 고향에 첫 발령을 받아 무려 17년간이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그저 스치기만 했다. 익숙한 데라 하여 다 아는 건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석곡마을 전경
석곡마을 전경

 

옥룡중학교와 옥룡 초등학교 사이
오른쪽 석곡교를 지나면 만나는 마을

석곡마을은 지금은 햇살 학교로 새 단장한 예전의 옥룡중학교와 면 소재지에 있는 옥룡초등학교 사이에 있다. 초등학교에 조금 못미처 오른쪽에 있는 다리를 건너면 만날 수 있다. 다리 왼쪽에는 <석곡마을>이라고 세로로 쓰인 거대한 표지석이 서 있다. 그 옆에는 마을의 유래가 적힌 표지판이 비스듬하게 서 있다. 아마도 그곳에 차를 대던 누군가의 운전 미숙으로 빚어진 일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 표지석에는 내가 취재하려던 석곡(石谷)대신 석실(石室) 마을이라고 적혀있다. 
 

석곡마을 표지석과 석곡교
석곡마을 표지석과 석곡교

 

표지판에 따르면 석실 마을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광양이 삼국시대인 백제에 마로현으로 불린 것으로 보아 광양 고을이 삼국 이전부터 만들어졌고, 광양읍에서 가까운 옥룡면의 역사도 그에 버금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마을에 돌이 많아서 주민들이 돌로 집을 짓고 살다 보니 석실(石室)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또 옥동 마을 뒷산 옥녀봉에 옥녀가 앉은 좌석이라고 하여 자리 석(席)을 써서 석실(席室)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석곡마을은 본래 광양현 북면(北面) 옥룡리(玉龍里) 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옥룡면에 속했다.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옥룡면 석곡촌(石谷村)이라고 하였다. 1912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옥룡면 석곡리라 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옥동리, 초장리, 장암리, 흥룡리, 대방리와 합해 용곡리(龍谷里)가 되었다. 현재는 광양시 옥룡면 용곡리 석곡마을이다.

표지석을 지나면 튼튼한 석곡교가 나온다. 자동차로 무심히 건넜다. 그런데 마을 취재를 하면서 구례와 광양에서 교육장으로 퇴직한 서종탁(81세) 님과 연결되었다. 그분은 29년 전인 1994년에 자신이 나고 자란 이 마을의 역사,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산업, 교통, 마을에 전해오는 지명, 석곡 출신 주요 인물을 정리한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누렇게 바랜 그 자료를 건네받으면서 한 개인의 노력이 30년 후에 이렇게 쓰이는 게 감개무량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우리가 하는 ‘옥룡이 나르샤’ 연재도 지금은 비슷비슷한 마을 소개로, 가치가 없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세월의 더께가 쌓이면 언젠가는 또 다른 역사로 남지 않을까 싶다. 부디 그러기를 소망한다.

서종탁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읽다 보니 새마을 사업으로 마을 안길 300미터를 포장하고 석곡교가 만들어지게 된 과정이 필자의 눈길을 끌었다. 자료에 따르면 마을에 돌석(石) 자가 들어간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마을 길은 돌투성이로 이루어져 다니기에 불편하였다. 한 번 비가 오면 흙이 씻기고 길이 파여 오가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1970년대에 새마을 운동이 번지면서 각 마을에서는 정부에서 지원되는 시멘트를 받아서 마을 안길을 넓히고, 포장하는 사업이 앞다투어 시작되었다.

1970년대 이전에는 옥룡천을 건너는 다리는 ‘삼정지’가 하나뿐이었다. 평소에는 마을 바로 앞에 징검다리를 놓았으나 비가 와서 냇물이 불어나면 그럴 수가 없었다. 옥룡천 동쪽에 사는 사람들은 멀어도 삼정지까지 돌아다녀야 해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마을별로 다리를 건설하는 붐이 일었는데, 정부 지원금이 부족해 자체 마을 자금을 보태야 했다. 

마을 재정이 비교적 풍부한 대방, 초암, 옥동, 덕천 마을은 그런 과정을 거쳐 다리를 만들었으나 석곡마을만 그러지 못했다. 다리보다 먼저 마을 안길에서 냇물까지 이르는 300미터의 안길을 포장했다. 그러나 자체 자금이 없어서 마을의 숙원사업인 다리를 놓는 일은 요원했다. 마을 사람들은 가까운 옥동 다리를 이용했다.

새마을 운동으로 마을의 숙원 사업인
석곡교가 만들어져

그러던 차에 당시 마을 이장인 서종숙 씨가 이 마을 출신으로 일본에서 사업가로 성공하여 광양읍에 살고 있던 재일동포 이삼동 씨를 만나 마을의 사정을 설명하며 지원을 요청했다. 이를 흔쾌히 수락한 이삼동 씨와 정부 지원으로 드디어 석곡교를 건설했다. 그러나 주민의 이런 노력에도 어느 해 홍수가 크게 나서 다리가 쓸려가 버리고 말았다. 2003년 정부의 수해 복구 지원 사업으로 현재와 같은 튼튼한 다리를 건설했다. 
 

석곡마을 회관
석곡마을 회관

 

새마을 사업으로 석곡교를 건설하기 이전에는 냇물에 노디(징검다리)를 놓고 건너다녔다. 여름에 큰비가 와서 홍수가 나면 며칠씩 학생은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또 노디가 떠내려가면 다시 노디를 놓아야 했다. 마을에는 윗 노디(마을 중심지에서 뒤쪽 들을 지나 지서 있는 곳으로 건너던 징검다리)가 있었는데 면 중심지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 학생들도 대부분 이곳을 건너 학교에 다녔다. 가운데 노디는 뒤뜰에서 이발소 쪽으로 건너는 징검다리인데 학교 가는 길은 가장 가까우나 지대가 좁고 낮아서 비가 조금만 와도 노디가 물에 잠겨 버리는 게 단점이었다. 아래쪽 노디는 석곡과 옥동 마을 사이에 있었는데 읍내 쪽으로 가는 길에 주로 이용했다.

오래 전 여러 사람의 노력 덕분에 만들어진 석곡교를 차로 편하게 건넜다. 다리 주변에 있는 집 두 채는 외지인이 들어와서 지은 집이다. 회관에 와서 신고식은 하지만 주민 대부분이 70대의 고령인 데 비해 젊은 분들이 살기에 왕래는 거의 없는 편이라고 서종학(75세) 이장이 말했다. 300여 미터 직선 도로를 달리면 비로소 석곡마을이 나온다. 우뚝 솟은 백운산이 동쪽으로 뻗어 억불봉(바구리봉)에서 잠시 멈췄고, 다시 남으로 길게 뻗어 내리다가 갈밭등에서 우백호(右白虎)를 이루며 내려와 정기(精氣) 등에서 한 줄기는 초암으로, 다른 한 줄기는 석곡 뒤로 뻗어 감나무골을 이루었다. 

좌청룡 우백호의 활 모양의 명당 터에
자리 잡은 석곡마을

감나무골은 5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 바로 뒤에 똘감나무 몇 그루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산이 온통 황토로 되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집을 짓거나 방을 만들 때 이곳의 흙을 퍼다가 사용했다. 음력 2월 15일, 2월 할매가 올라간다는 날이면 이 황토를 퍼서 부엌에 놓고 대나무 가지를 꽂아 손을 비비며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갈밭등에서 남쪽으로 더 내려와 마장(馬場)에서 서쪽을 향해 뻗어 내린 좌청룡(左靑龍) 끝에서 멈추었다. 즉 좌청룡 우백호 사이에 개울 양쪽으로 마을이 만들어져 활 모양의 명당 터에 석곡마을이 자리 잡았다.

예전에는 큰 골(마장재를 말하며, 옥곡면 수평리 사람들은 광양 오일장, 중학생들은 옥룡중학교를 다닐 때 이용하였다) 작은 골(마장에서 우백호를 내려와 초암과 석곡으로 갈라지는 등을 정기 등이라 하였다)에서 흘러내린 개울이 합쳐져서 마을 입구에 조그만 폭포가 되어 못을 이루었는데 이를 ‘용소’라고 불렀다. 당시에는 꽤 크고 깊었으며, 근처 바위에는 용이 밟고 올라갔다는 발자국 모양이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그 개울을 복개하여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옥곡면 수평리 학생들이
옥룡중학교에 다닐 때 이용하던 큰 재

옥곡면 수평리 사람들이 큰 골(당시에는 큰 재라고 불렀다)을 넘어 옥룡중학교를 다닌 게 신기했다. 그때의 이야기를 현대삼호중공업에서 상무로 퇴직한 주정식(60세) 씨에게 들었다. 

그는 옥곡면 수평리 출신으로 옥룡중학교 5회 졸업생이다. 당시에 옥곡에는 중학교가 없어서 진상중학교까지 다녀야 했다. 옥곡까지만 해도 6km라서 한 시간 반이 걸리기에 그곳에서 진상까지 버스를 타고 진상중학교까지 다니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산길이고, 큰 산을 넘어야 했지만 한 시간 20분이 걸리는 옥룡중학교에 다녔다. 

날씨가 좋을 때는 상관없지만 비나 눈이 오는 궂은 날엔 어떻게 다녔을까? 수평리에서 산을 넘어 옥룡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한 학년에 열다섯 명쯤이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날에는 우산을 쓸 수가 없었다. 비료 포대를 옷처럼 만들어 입고, 가방은 비닐로 싸서 태권도 도복의 긴 끈으로 엑스 자로 묶어 등에 업었다. 길이 좁다 보니 일렬종대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도 여학생은 그 줄의 가운데에 세우고, 남학생이 앞과 뒤에서 호위하듯이 걸었다. 한 시간이 넘으면 이슬에 신발이 엉망이 되기에 학교 갈 때 신는 천 운동화는 석곡 마을 뒤 냇가 바위에 숨겨 두고, 마을을 오갈 때는 고무신을 신고 다녔단다. 결국 주정식 님은 중학교 3학년 때는 석곡 마을에서 1년 후배와 자취했다. 수평리 학생들이 가장 부러웠던 건 학교 바로 뒤에 사는 옥동이나 석곡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었단다.     

마을의 경계로는 남쪽에는 옥동 마을, 서쪽에는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상평 마을, 북쪽으로는 되목거리(마을에서 초암으로 넘어가는 길 중 들길과 만나는 삼거리를 이르는 말)와 덤바구(정자나무 옆길을 통해 산으로 올라가는 골짜기를 이르는 말)를 사이에 두고 초암 마을, 동쪽으로는 갈밭등과 마장재를 사이에 두고 옥곡면 수평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38호가 사는 석곡 마을에 들어섰다. 오른편에 절이 아닌가 싶은 웅장한 기와집이 보인다. 나중에 주민들에게 확인하니 판사 출신으로 현재는 순천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서현무 씨가 고향으로 내려와 본가 터에 지은 집이라고 했다. 

회관에서 화투 치며 노는 마을 어르신
잘 단장된 골목을 지나 마을 회관에 닿았다. 다른 마을과는 달리 단층이 아니라 높다란 언덕배기에 2층으로 지어졌다. 회관으로 들어서니 양만웅(88세), 김영재(85세), 서순남(86세), 이경애(77세) 어르신이 둥근 탁자 위에 담요를 깔고 의자에 앉은 채 화투를 치고 있다. 옆에는 구경하는 채신례(92세) 어르신도 있다. 서종호(80세) 어르신은 돈을 세다가 맞이한다. 오늘이 그동안 모아둔 돈을 현금으로 바꾸는 날이란다. 
 

왼쪽부터 양만웅, 서종호, 김영재, 서순남, 채신례, 이경애 어르신
왼쪽부터 양만웅, 서종호, 김영재, 서순남, 채신례, 이경애 어르신

 

화투판이 끝났다. 어르신께 오늘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니 하필 오늘이냐며 아쉬워한다. 회관에서 밥을 해줄 때는 평균 열다섯 명 이상이 모이는데 그 사업이 지난 10월에 끝나 버려서 오늘은 적게 모인 거란다. 시에서 식사비와 밥 해주는 사람 인건비를 줘서 한 달에 열 번, 1주일에 두세 번 함께 식사한다. 집에서 점심은 각자 먹고 오후 두 시쯤에 모여서 화투를 치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놀다가 다섯 시 반쯤에 저녁을 먹는 것이다. 열다섯 명이나 앉기에는 회관이 너무 좁은 것 아니냐는 물었더니 “그래서 2층을 올렸는데 아무도 안 올라가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 판에 100원짜리 민화투를 친다. “우리는 경찰이 와도 이렇게 치고 노요.” 한 어르신이 말한다. 진 사람은 100원을 자물쇠가 달린 돈통에 넣는다. 그렇게 모인 돈이 이번에는 27만이 되었단다. 그 돈으로 먹고 싶은 걸 사 먹는다. 심부름은 서종학(75세) 씨가 한다. 그는 10년째 장기 집권 중인 이 마을의 이장이다. 

10년째 마을 이장으로 일하며 서종학 씨 
이장의 임기는 원래 3년인데 할 사람이 없어서 계속하고 있다. 마침 취재 간 날이 새 이장의 출마 마감일인데 별다른 일이 없으면 또 이장으로 뽑힐 거라고 예상했다. 옥룡에서 동갑 셋이 있는데 이번에 다른 마을의 이장이 바뀌면 아마도 최고령 이장이 될 거라고 했다. 마을 자랑을 부탁했더니 대뜸 “우리 마을은 돈을 잘 내요.”라고 말했다. 마을에서 다른 지역으로 버스를 대절하여 놀러 가면 나간 돈보다 들어온 돈이 훨씬 많아 적자가 나지 않는단다. 이장은 사람들이 자기를 믿고 신뢰하니 그렇지 않겠냐고 주민들에게 고마워했다. 그렇게 쓰고 남은 돈은 사람들의 간식거리가 되어 준다. 광양 장에서 오징어와 미나리를 사 와서 오징어회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아구찜이나 통닭, 족발을 주문하기도 한다. 이때도 심부름꾼은 당연히 이장님이다. 특별한 문화재나 볼거리가 있는 건 아니지만 햇빛 잘 들고, 양지바르며, 마을 사람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게 진정한 자랑거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철쭉이 섬어진 석곡마을 논

 

석곡 마을은 논과 밭이 적다. 농토가 적어 아이 키울 때는 힘들었으나 대신 뜰이 넓은 다른 마을 아낙처럼 힘든 일은 안 해 봤다고 서순남 어르신이 말한다. 그나마 있는 농토도 지금은 꽃 모종을 키우는 순천 사람들한테 빌려 줘서 짓지 않는단다. “같이 잡숴. 요리 와, 같이 묵게. 머리 맞대고 묵는 게 좋은 거여.” 이경애 어르신이 호두과자를 필자에게 권하며 정겨운 광양 사투리로 말한다. 

농촌의 마을이 거의 다 그렇듯이 이 마을도 늙어 가고 있다. 젊은 사람이 없고 70대 이상의, 노인 혼자 사는 집이 대부분이다. 농촌 마을의 현재 모습이다. 전남에서 지방 소멸 위기 지역이 22개 시군 중 열세 곳에 이른다. 이 어르신들이 떠나고 나면 마을은 누가 지키나. 정답게 잘 노는 어르신을 뒤로 하고 나오는 길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석곡교로 나오는 길 양쪽에 철쭉과 홍가시나무 묘목이 짧은 겨울 햇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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