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여건 속에서 개최된 심포지엄이었기에 더욱 뜻깊었다. 지난 12월 하순에 국내 최고 봉수 전문가들의 발표와 여러 민간단체의 후원 덕분에 건대산 봉수 학술심포지엄 행사를 나름 성황리에 마쳤다. 도와주신 분들과 재정 지원을 해준 익명의 후원자님께 무어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심포지엄에서 진지하게 토의되었던 사항과 참가자들 다수가 공감한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조선시대, 광양의 봉수는 건대산에 있었다

역사는 웅숭깊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광양의 건대산에서는 봉수가 뭉근하게 피어올랐다. 지난한 세월이었지만 꾸준하고 끊임없이 연기와 횃불로 남쪽 바다 안녕의 상황을 순천 성황당 봉수대로 전달하였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세종실록지리지를 비롯한 10여 권의 고문헌에서 광양현을 소개하는 난에 어김없이 건대산 봉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또한, 무려 20점이 넘는 조선의 고지도에서 광양에 건대산 봉수가 있음을 표기하고 있었다. 회화식 지도인 고지도에서는 건대산 봉수를 불꽃 모양으로, 깃발 모양으로, ‘자 모양으로, 연대(煙臺) 모양으로 그렸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고문헌과 고지도에서 건대산의 한자어는 아주 다양하게 기록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가장 많은 경우는 件臺山이었다. 그러나 가운데 자는 ’, ‘’, ‘’, ‘등 여러 한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건대산을 한자어 뜻 그대로 풀이하면 생뚱맞은 해석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한편, 광양의 건대산 봉수와 유사한 이름을 가진 봉수로 경기도 용인 건지산(乾芝山, 巾之山) 봉수와 충북 청주의 것대산(巨叱大山) 봉수, 경북 구미 건대산(件垈山) 봉수, 황해도 봉산 건지산(巾之山) 봉수, 황해도 은율의 건지산(巾之山) 봉수 등이 있다. 이들 지명의 기원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가 요망된다.

건대산은 지금의 구봉산이다

현재 광양에는 건대산이라는 산이 없다. 옛 봉수가 있었던 산을 구봉산(옛 봉화산의 줄임말임)과 봉화산으로 부르고 있다. 건대산이 언젠가 구봉산 또는 봉화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얘기다. 그 바뀐 시기를 찾아야 한다. 또 하나, 건대산은 현재의 구봉산인가 아니면 봉화산인가의 의문을 풀어야 한다.

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지도가 있다. 일제강점기 대정 7(1918) 광양지도에 구봉화산과 구봉화산 서쪽에 봉화산이 표기되어 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구봉산과 봉화산의 명칭은 늦어도 일제강점기부터 사용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구봉산 및 봉화산의 봉수에 대한 학술조사는 두 차례 진행되었다. 1999년 순천대박물관은 지표조사를 통해 봉화산에는 봉수대와 관련한 유구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고 구봉화산 정상부에만 봉수대 흔적이 남아 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광양시의 호국항쟁유적, 69) 2005년 남도문화재연구원은 구봉산 정상부 트렌치 조사를 통해 자연암반층 위에 큰 할석을 이용하여 지름 800cm 내외의 원형 연대를 설치하였던 것으로 발표하였다.(광양시의 지석묘와 호국항쟁유적, 87)

그리고 202310월 홍성우 봉수 박사와 함께 봉화산을 답사하였을 때, 홍 박사는 봉화산 정상부는 너무 협소해 조선시대 봉수대의 입지로는 적당하지 않다.”봉화산은 임시적으로 사용한 봉수대, 즉 건대산 봉수를 잠시 대체하는 용도로 사용했든지 아니면 임진왜란이나 조선후기 이양선 출몰 시 일시적으로 사용한 봉수대일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밝혔다.(광양시민신문, 2023109일 기사)

조선시대 고문헌과 고지도에 나오는 건대산의 명칭, 구봉산과 봉화산에 대한 두 차례의 학술조사, 그리고 봉수 박사의 현장 답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조선시대의 건대산은 지금의 구봉산으로 결론 내리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조선시대 모든 기록과 지도에서 사용된 건대산 봉수와 구봉산에 현재 남아 있는 봉수 유적이 일치하고, 임시시설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봉화산 봉수를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사용된 건대산 봉수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역사는 계획된 과거가 아니고 오래된 미래이다.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 필자의 막연한 생각으로는 조선시대 광양 사람들이 봉수가 있는 산을 건대산이라 불렀고, 19세기 후반 어떤 사정이 생겨 광양의 봉수를 구봉산에서 봉화산으로 옮기면서 봉화산을 일시적으로 건대산으로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물론 추정일 뿐이다.

1()의 봉수는 평안함의 상징이었다

역사는 인간의 의지가 만든 필연인 경우도 있지만, 가끔은 의도와는 달리 우연히 엉뚱한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 결국 역사는 필연과 우연 사이에 있다. 봉수의 경우는 우연에 가까운 결과를 낳았다. 변경의 비상 상황을 중앙에 보고하기 위한 군사 통신시설로 고안되었지만 실제로는 평상시에 1거의 봉수를 올려 국태민안을 상징하는 평안화의 역할을 더 많이 하였다.

조선시대 한양의 남산(목멱산)에는 한반도 변방에서 5대 노선의 직봉을 타고 올라온 봉수 상황을 왕에게 보고하기 위한 봉수대가 5군 데 있었다. 5곳 남산 봉수대에 1거의 횃불이 피어오르면 온 나라가 평안함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1거의 봉수를 평안화라고 불렀다. 봉수가 과거의 화석이 아닌 지속적인 생명력을 지닌 유의미한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평안화의 가치를 적극 되살려야 한다.

현재 광양에는 2013년 구봉산 전망대에 설치된 메탈아트봉수가 평안화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필자는 타지로 외출을 나갔다 돌아오는 고속도로 위에서 구봉산 전망대 봉수의 반짝이는 불빛을 보면서 평화로운 광양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할 때가 많다. 메탈아트봉수의 조명 장치를 좀 더 생동감 있게 바꾸어 광양이 그야말로 낮과 밤이 빛나는 역사의 도시로 거듭 태어나면 좋겠다.

구봉산 전망대의 홍보관을 봉수 전시실로

구봉산 전망대 홍보관 사진을 찍기 위해 하필 찬 바람이 부는 겨울날 오후에 구봉산 전망대에 올랐다. 그런데 전망대 바로 아래 주차장이 가득 찰 정도로 제법 사람들이 많아 깜짝 놀랐다. 홍보관 옆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는 분들도 있었고 전망대 위에서 광양만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런데 까페 옆 홍보관은 텅 비어 있었다. 근무 중인 해설사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한참 동안 전시물을 살펴보고 모니터의 홍보 영상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는 동안 아무도 얼씬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홍보관의 전시물과 영상은 모두 구봉산 봉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반적인 광양시의 관광 홍보였다. 그 흔한 봉수 관련 리플릿 하나가 없었다.

 

구봉산 전망대 홍보관 전경, 전시물과 홍보 동영상에 봉수와 관련된 내용은 없다
구봉산 전망대 홍보관 전경, 전시물과 홍보 동영상에 봉수와 관련된 내용은 없다
구봉산 전망대 홍보관에 비치된 리플릿, 봉수 관련 자료는 없다
구봉산 전망대 홍보관에 비치된 리플릿, 봉수 관련 자료는 없다
구봉산 전망대 홍보관 광양 특산물 코너, 실제 판매는 하지 않는다.
구봉산 전망대 홍보관 광양 특산물 코너, 실제 판매는 하지 않는다.

현재 구봉산 전망대에는 봉수와 관련된 안내판이 두 군데 있다.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 아래 축대에 있는 구봉산 전망대 안내도에 구봉산의 유래와 옛 봉수대, 그리고 메탈아트 봉수대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있다. 그리고 메탈아트봉수대 바로 앞에 작은 금속 안내판이 있다. 이게 전부다. 그나마도 최근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지 못하다 보니 잘못된 내용도 눈에 띈다.

전망대 아래 임시 주차장 담벽의 구봉산 전망대 안내도
전망대 아래 임시 주차장 담벽의 구봉산 전망대 안내도
메탈아트봉수대 앞의 금속 안내판
메탈아트봉수대 앞의 금속 안내판

세상사는 적시적소(適時適所), 즉 알맞은 때와 자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구봉산 철 구조물 설치에 대한 여러 의견이 나오는 이때가 바로 전망대 홍보관을 봉수 전시실로 바꿀 적기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즐겁게 놀이하며 배울 수 있는 최첨단의 작은 봉수 박물관을 만들어 이곳이 바로 조선시대 500년 동안 광양 평안의 횃불을 올렸던 건대산 봉수가 있었던 곳임을 홍보하여야 한다.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안다면 그 누가 감히 구봉산 전망대를 탐하겠는가?

 

제공=이은철 광양지역史연구회 마로희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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