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래길에서
구불구불한 봉강 길은 자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산맥의 흐름이 유순해진 곳에 으 레 마을이 들어서 있고 산속으로 깊이 파고들수록 다가오는 풀 내음이 진하다. 한적한 길을 따라 부지런히 오르다 신촌마을 앞에 이르면 작은 교차로가 보인다.
입구의 녹색 표지판에는 간전, 구례를 향하는 화살표와 성불사로 향하는 화살표가 또렷하게 갈라져 있다. 외길이 주는 단순함과 한적한 분위기에 머릿속 복잡한 생각들은 어느새 지워져 버렸지만, 간전, 구례라는 도시의 표지판은 또 다른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간전, 구례는 봉강지역과 등을 맞댄 가깝고 낯익은 도시이다. 매천 황현이 어릴 때부터 스승에게 수학했고 한양에서 낙향해 후학을 양성한 곳이다.
또한 임진왜란 전후에 군사요충지였던 석주관에서 강희열 의병장이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 시절 단성 (산청군)에서 싸우던 숙부 강인상을 구하기 위해 강희보는 의병을 모아 광양에서 달려갔고 강희열은 석주관에서 달려갔다. 숙부의 안위를 염려하며 다급하게 전장으로 달려간 일을 생각하면 그들의 깊은 가족애가 느껴진다. 길가에 우뚝 선 형제의병장마을이라는 긴 간판을 보니 그곳에서 나고 자란 의병장의 생애가 그려진다.
전장에서 들리는 소식과 불안한 민심, 당장 달려가야 할 것인 지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인지, 여러 생각의 갈래길 앞에서 고민하지 않았을까? 그들이 쉽고 편한 길로만 가고자 했다면 전장으로 달려갈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신촌마을 입구에 있던 옛 표지석은 저만치 뒤로 물러서 있고 대신 형제의병장 마을이라는 큰 간판이 앞장서서 그들의 짧지만 치열했던 삶을 안내해 주고 있다.
신촌(莘村) 마을의 처음은
결혼식 날 밤 신부가 수줍게 고개를 숙인 모습을 닮았다는 족두리풀(細莘)과 입에 물면 맛이 달짝지근해 배고픔을 잊게 해 주었던 띠(基)풀꽃이 많았다 하여 띠밭골로 불렸다. 신촌(莘村)마을 윗 동네 질매재마을 동남쪽은 지금도 띠밭골로 불린다.
봉강에서 순천시 서면 청소리로 가는 고개 밑에 위치한 질매재는 옛날에는 신계촌(莘溪村) 또 는 신기촌(莘基村)으로도 불리었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지명으로 사용하기 불편하다며 가운데 계나 기자(字)를 없앴다. 신촌이란 지명은 그렇게 생겨났다.
마을에 살았던 할머니들은 주변이 평평하고 띠풀과 약초들이 많아서 이웃과 어울려 약초를 채취하기도 하고 종종 놀이 장소가 되기도 했다. 배고픈 시대였기에 많은 풀과 약초들이 많이 자생하고 있다는 이유가 지명이 될 만큼 띠풀과 약초는 소중한 자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질매재마을에서 신촌마을로
신촌마을은 고문헌에는 안치리(鞍峙里), 안장 고개라는 지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전(全)씨 성을 가진 사람이 처음으로 질매재에 터전을 잡았던 때는 1480년경이었다고 전해지는데 마을의 형태를 갖춘 것은 1900년대 초로 추정되고 있다.
질매 (질마)는 짐을 실어 나르는 소의 등에 얹은 안장을 말하는데 질매재는 이 마을의 산고개를 일컫는 말이며 짐을 실어 나르는 소의 등처럼 생긴 가파른 골짜기를 말한다. 안치리 역시 우뚝 솟은 안장처럼 가파른 산골짜기란 뜻이다. 서정주 시인의 시집 ‘질마재 신화’에서 보듯 질매재란 살면서 겪어야 할 고달픈 인생에 비유하기도 한다.
광양에서 구례로 향하는 새로운 865 지방도가 없었다면 이곳은 한 번 들어서면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험준한 골짜기였다. 까마득히 오래전이었는데도 사람들은 왜 이처럼 좁고 깊은 곳에 터전을 잡았을까? 혹시 계곡을 에워싼 산을 이리저리 휘돌 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 자리에 눌러앉았던 것 인지, 아니면 속세를 떠나고 싶은 마음에 더 아득 한 곳으로 숨어들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산길은 되돌아오는 길이 걱정스러울 만큼 질매재 마을은 작고 긴 계곡을 따라 형성되었고 길을 따라 가다 보면 간간이 드러나는 하늘조차 몹시 작아 보였다. 오랫동안 질매재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은 여순사건을 계기로 모두 거처를 아랫마을인 신촌 마을로 옮겨왔다. 지금도 질매재는 마을이라기 보다는 협곡에 가깝다.
마을을 향해 가는 꼬부라진 길은 계곡을 따라 깊은 산으로 이어진다. 오랜 세월 동안 험준한 산속에서 살아왔던 마을 사람들이 떠난 깊은 골짜기에는 문명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새들처럼 스며들고 군데군데 자연을 즐기는 별장들이 종종 눈에 띈다.
또한 요즘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자연 캠핑장이나 음식점들이 들어와 주민들이 떠난 빈자리를 메우고 있다. 첩첩산중에 숨어있는 협곡은 사람들의 손 때가 묻지 않은 청정 휴양지가 되어 세간의 눈길을 끌고 있다.
형제의병장마을
마을 진입로에서 계곡을 가로지르는 긴 다리를 건너면 수령 320년 팽나무가 높고 주위를 두른 돌담 위로 고풍스러운 작은 정자가 소박하다. 마을의 푸르름과 안녕을 관장하는 당산나무는 든든 하고 믿음직스럽다. 마을 안에는 밭과 주택이 혼재되어 있고 밭에는 과일나무들과 푸른 채소들이 가득하다.
당산나무 앞으로 넓게 펼쳐진 주차장과 쌍의사와 묘역 안내판은 찾아오는 이들을 환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선한 마음이 느껴진다. 신촌마을 안에는 두 개의 갈래길이 있고 두 개의 마을이 공존한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산촌마을과 형제의병장이 영원히 살고있는 마을이다.
쌍의사 사당으로 가는 골목의 담벼락 벽화는 임진왜란 전투 장면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젊은 의병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현장감이 전해진다.
쌍의사가 잠들어 있는 묘역을 향해 계단을 오르다 보면 훌쩍 자란 편백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숲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부드럽다. 산 중턱에는 전쟁터에서 일당백을 감당하며 처절하게 죽어간 그들이 누워있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 었겠는가?
비록 산속 작은 마을에서 자랐지만, 누구보다 의롭고 숭고한 삶을 꿈꾸었던 이들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전장에서 사라졌지만 돌아와 고향 땅에서 영면하고 있다. 쌍의사를 배출한 것 만으로도 신촌마을의 무게감이 더해진다.
젊은이들이 돌아오는 마을
평소 무심코 길을 지나치기만 했는데 마을 안으로 들어와 보니 의외로 넓고 우거진 나무들이 많았다.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집들 사이에 펼쳐진 밭은 이웃과의 담벼락을 대신하듯 넉넉한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 마을은 봉강의 중심이예요. 생선으로 치면 살코기가 많은 가운데 부분이지요. 뜰도 넓고 멀리까지 트여있지요.”
마을을 생선의 부위에 비유하는 할머니의 표현이 재미있다. 평지가 넓은 탓에 농부들은 주로 벼농사, 목화 농사를 많이 지었다. 온통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인 봉강지역에 넓은 경작지를 소유했다는 것은 당시에는 부유한 살림살이를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곳은 다른 지역에 비해 젊은 일꾼들이 많다. 도시에 살던 젊은 사람들이 새롭게 자리를 잡으면서 벼농사는 자취를 감추었고 지금은 배나무 복숭아나무 복분자들과 표고버섯 등을 키우는 비닐하우스 단지들이 들어섰다. 마을 길을 한 바퀴 걷다 보면 생기 발랄한 아이들 소리가 반갑고 우거진 푸른 나무들과 어우러진 주택들이 마음을 아늑하게 한다.
가난했던 부자마을
신촌마을에는 유난히 오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지금도 13가구가 살고 있지만 예전에는 훨씬 많은 오씨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삼촌, 조카, 백부, 숙모, 당숙 등으로 단단하게 끈을 잇듯연관된 사람들이 이웃하며 사는 모습이 신비하고 흥미로웠다. 요즘 같은 세상에 가족 친지들이 한마을에서 정답게 사는 모습에서 씨족사회의 감성과 정서가 느껴진다.
지금도 고추밭에서 일손을 놓지 않는 오치열(92) 어른에게 오씨 집성촌이 생긴 이유를 물어보았다. 오씨의 선조는 본래 보성에 살았는데 까마귀(烏)는 산에서 힘차게 날고 번창하니 오씨들은 산이 깊은 곳에 살아야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산촌으로 들어왔다며 우스개 소리하듯 들려준다.
질매재 계곡에서 흘러온 물과 도솔봉에서 흘러온 물이 마을 앞에서 만나 서천으로 흘러간다. 과거에는 마을로 진입하기 위해 징검다리로 건넜던 마을의 진입로는 높은 시멘트 다리로 바뀌었고 낡은 집들도 대부분 현대식으로 바뀌었다. 마을은 넓고 숲이 많아 쾌적해 보인다. 찬찬히 둘러보니 좋은 마을이 갖추어야 할 좋은 조건은 두루두루 갖추고 있다.
할머니들이 살아온 길
마을회관에서 점심을 막 끝내고 함께 오수를 즐기던 할머니들은 느닷없는 필자의 출현에 자리를 고쳐 앉는다. 옛날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필자의 요청에 긴 한숨이 먼저 나온다. 옛날이라면 고생했던 기억밖에 없다고 한다. 눈만 뜨면 땔감 나무를 하러 먼 산으로, 거름을 만들기 위해 쉼 없이 풀을 베어 날랐다.
몰래 가족들을 이끌고 깊은 산에 들어가 여러 날을 숯을 굽고 장작을 준비하기도 했다. 무거운 짐을 지게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짚신을 신고 읍내 오일장에 팔았다. 산길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머리의 짐은 무겁고 발은 아파 쉬고 싶었지만 짐을 내려줄 사람이 없어 울며 걸어야 했던 기억들이 생생하다. 살아가면서 다가왔던 희로애락의 순간들은 힘겨웠던 시간 속으로 깊이 묻혀버린 듯했다.
요즘은 겨울이면 정부에서 난방용 기름도 공급해 주고 게다가 마을회관에서 점심도 주니 한결 수월해진 인생이다. 젊어서 애써 키운 자식들은 모두 대처로 나가 잘살고 있고 어쩌다 명절 때가 되어 고향으로 찾아온다. 할머니들은 그들끼리 가까운 가족이자 친구가 되어 일상을 공유하니 외로울 것도 없다. 마을회관에는 사시사철 할머니들이 모여 식사하며 낮잠도 수다도 함께 즐긴다. 널찍한 골목에는 아이들이 공을 차는 소리, 밭에서 경운기를 움직이는 젊은이들의 소리가 들린다. 삶의 거친 장애물이 사라지고 안정감이 넘치는 활기찬 마을이다.
신촌마을의 봄
이른 봄에 내민 새싹들이 불쑥 자라 밭은 푸릇푸릇하다. 매실나무와 배나무에는 꽃이 지고 작은 열매들이 열고 있다. 산모퉁이에 있는 쌍의사 묘역도 고요한 사당도 쏟아지는 봄볕을 받고 있다. 사당 앞으로 펼쳐진 밭 한가운데에서 할머니 한 분이 무언가를 열심히 뜯고 있다. 손에는 한 웅큼 고사리들이 들려 있었다.
“지금 뜯는 고사리는 너무 질기지 않나요?” 봄볕 아래서 그냥 지나치기가 머쓱해서 건넨 말이었다. “허허! 그렇긴 해요, 근데 이렇게 자꾸 순을 내미는 데 못 본 척할 수가 있어야지…”
할머니에게서 진솔한 농부의 마음을 읽는다. 봄이 되니 땅에서 움을 올리는 많은 것들이 소중해 보인다. 쌍의사 앞뒤로 의병장 묘소에도 봄이 한창이었다. 들판을 스치듯 지나는 봄바람이 부드럽다. 괴롭고 힘든 시간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많은 초록 잎이 앞다투어 얼굴을 내밀었다. 더러는 왜 이리 늦었냐고 채근하듯 불쑥 웃자라있기도 했다.
다시 또 새로운 세상이 시작됨을 알리고 있다. 계절이 다시 돌아오듯 형제의병장도 매번 고향 땅에서 새싹들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 무사히 살아가고 있는 것도 나라를 구하려 했던 그들의 용기와 과거 어른들이 견뎌내었던 고난의 산물일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마을은 평범하고 작아 보이지만 그 속에 간직한 이야기는 결코 작지 않다. 우람한 백운산을 닮아 사람들은 강직하며 의로운 일 앞에서는 그대로 지나치지 않는다.
매사에 경위가 바른 것도 광양사람들의 특징일 것이다.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신촌마을 땅속 깊이 묻혀있는 오래전의 이야기를 캐내고 그 이야기의 뿌리에서 돋아난 큰 줄기들이 어디로 향하고 어떤 열매로 돌아오는지 살펴보는 것이 내게는 매우 의미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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