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옹불암(舞翁佛岩)
권민정 안성안법고 2학년

순자씨는 매일 나의 집 담벼락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담쟁이 넝쿨을 한 장씩 떼어갔다. 빈자리가 생기면서 나는 쩌억-소리가 순자씨에게 무언가를 잃는 순간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오전 8시가 되면 한 번, 오후 6시가 되면 또 한 번의 이별을 배우던 셈이다. 시든 잎보다 주름이 많은 손으로 넝쿨을 쓸면 잔털이 손끝을 스쳤다. 순자씨는 자주 잎들을 어루만졌다. 계속 기억하고 싶은 감각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순자씨는 마을 끝자락의 낡은 집에 사는 할머니였다. 길거리에선 자주 보였지만 그의 집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항상 샛노란 수레에 폐지를 줍던 순자씨가 어느 날부턴가 나의 집 앞을 서성였다. 폐지를 드리기도, 물을 건네드리기도 했지만 순자씨는 낚아채 버리곤 다시 담벼락을 바라보았다. 그때 즈음부터 담쟁이넝쿨이 야위어 갔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잎 두 장이 매일 같이 사라졌다. 그럴수록 앙상해지던 넝쿨처럼 인내심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순자씨에게 화를 내보기도 했다.

“아니, 남의 집 식물 잎을 왜 자꾸 따 가시는 거예요?”

순자씨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되레 성화를 냈다.
“내가 우리 똥강아지 좀 만지겠다는데 왜 그랴!”

그런 식으로 순자씨와 대화를 시도하면 이해할 수 없는 문장만 돌아왔다. 어떻게 담쟁이 넝쿨이 똥강아지인지, 손주도 없으신 분에게 똥강아지란 말이 왜 나오는지 알길이 없었다. 아니, 애당초 내 식물인데 순자씨가 때때로 절도범으로 보였다. 넝쿨은 아무리 빗어도 찰랑거리지 않았다. 되려 순자씨의 손길을 받고 나면 더 헝클어졌다. 나는 순자씨가 외출하는 시간마다 담벼락 앞에 섰다. 하지만 늘 잎을 떼가고 쓰다듬는 습관은 사라질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다툼만 잦아질 뿐이었다.

그 날도 넝쿨을 지키며 순자씨를 기다렸다. 아침에 이미 잎을 훔쳐 갔던 순자씨였기에 오늘은 꼭 결판을 내려던 참, 저 멀리 노오란 수레가 비쳐왔다. 그런데 더 다가오지 않고 정지해 있었다. 평소 같으면 떨어지는 넝쿨 잎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올 텐데. 목을 더 길게 빼고 지켜보자 넘어진 순자씨가 보였다.

떨어진 잎처럼 털썩 주저앉은 모습에 덜컥 걱정이 들었다. 아무리 종일 싸우는 사이였어도 순자씨는 나이가 많아 몸이 약할게 분명하단 생각이 울렸다. 순자씨에게 다가갔다. 수레의 손잡이를 잡고 미세히 떨던 두 손. 한 번도 작아 보이지 않던 순자씨가 가까스로 줄기에 매달려 있는 나뭇잎 같았다. 순자씨는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수레에 넣어둔 물과 삼켜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귀를 스쳤다.

순자씨에게 손을 내밀었다. 놀란 눈으로 순자씨를 쳐다보니 자주 있는 일이란 듯 일어서 무릎을 털었다. 하지만 태연한 표정에서도 커진 동공은 감출 수 없었다. 순자씨는 엉킨 넝쿨처럼 삐뚤빼뚤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나는 수레 손잡이를 잡고 순자씨에게 집까지 길을 안내해달라 했다. 순자씨는 자존심이 상한 양 나를 차갑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수레를 끌고 걷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돌부리에 바퀴가 걸리면 순자씨는 혀를 찼다. 그럼에도 쓰러지는 순자씨의 뒷모습이 생각나 순자씨가 마냥 약한 사람 같아 보였다.

십여 분을 걸었을까. 담도 없는 집 앞에 도착했다. 순자씨는 열쇠로 철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갔다. 꼬질꼬질한 강아지 한 마리가 짖어댔다. 마치 성질을 부리던 순자씨마냥. 그 강아지는 눈물자국이 심하게 나 있는 몰티즈였다. 체구가 작아서 경계가 심했다. 순자씨는 강아지를 똥강아지, 하고 부르며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강아지의 털이 시든 줄기처럼 버석거렸다. 구석엔 나뭇잎이 잔뜩 쌓여 있었다. 내가 그걸 보고는 흠칫하자 순자씨는 강아지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을 꺼냈다.

“저걸 만지면 우리 똥강아지를 만지는 것 같어. 그래서 버리질 못하겠어. 강아지가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순자씨의 나긋한 목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한참 무슨 반응을 해야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낡은 벽지엔 곰팡이가 듬성히 펴 있고 푸르던 나뭇잎은 갈색빛이 된 채 쌓여 있는 집. 모든 게 시들어 갔다. 담쟁이넝쿨 잎도, 순자씨도, 그 옆의 강아지도. 강아지는 뿌연 눈으로 순자씨를 올려다봤다. 나를 보고 지친 듯 짖기를 멈추었다. 강아지와 순자씨는 담쟁이 넝쿨과 담이 된 것 마냥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강아지에게서 순자씨의 표정이 보였다.

어쩌면 둘은 담쟁이넝쿨보다 약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담쟁이넝쿨끼리 엉켜붙는다면 자라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서로에게 담벼락이 되어준다면 두 넝쿨은 모든 걸 넘어버릴 수 있다. 그게 죽을 고비여도. 작은 창문 틈새로 바람이 불었다. 쌓인 나뭇잎이 바스락거렸다. 난 나뭇잎을 만지면서 강아지를 바라봤다. 이 집이 아무것도 남지 않고 텅텅 비는 날 이 오면 저 나뭇잎은 어디로 가게 될까. 다른 사람들은 저걸 보면서 강아지 라 생각하지 않을텐데.

차가운 마룻바닥을 딛고 일어나며 강아지에게 짧은 손 인사를 건넸다. 강아지는 퀭한 표정으로 앉아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한 걸움, 한 걸음 집과 멀어질 준비를 하며 나는 순자씨의 집을 나섰다. 철물을 닫으려다 말고 순자씨에게 인사를 건넸다.

“앞으로 넝쿨 잎 따가셔도 돼요. 더 키워놓을게요.”
끼익- 문이 닫히는 소리가 강아지의 울음으로 들렸다. 순자씨의 표정을 보지 못한 채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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