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부터 한국학호남진흥원의 후원을 받아 광양지역史연구회 마로희양이 ‘2023 호남한국학강좌’를 매주 수요일 진행하고 있다. 광양 역사와 관련된 각 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하여 현재 7강을 마치고 10월 18일(수) 빨치산의 딸 정지아 작가의 마지막 강좌를 남겨두고 있다. 여기서는 4강의 주제였던 ‘옥룡사 선각국사 도선과 통진대사 경보’ 강좌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한국불교사 전문 연구자를 강사로 모시다 
4강의 강사였던 최연식 교수는 한국불교사를 전공하고 현재 동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최 교수를 잘 아는 분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불교사는 물론 동아시아 불교사 전반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갖춘 드러나지 않은 권위자’이다. 그래서 꼭 모시고 싶었다. 언젠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 답사에서 만났을 때 선각국사 도선에 대한 강의를 부탁하자 난색을 표했다.

최 교수가 ‘광양에서’ 옥룡사 강의를 부담스러워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선각국사 도선에 대한 일반적 사실과는 다른 생각을 광양 시민들을 대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난감하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서울과의 거리 문제로 주중에 광양까지 내려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생김새와는 달리 ‘들이대기’를 좋아하는 필자가 이번에는 꼭 모시겠다는 다짐으로 당부 하나와 해결책 하나로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첫 번째 문제는 광양분들도 선각국사 도선에 대한 학계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볼 기회가 필요하다고 간청했다. 두 번째 거리 문제는 비대면 수업으로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이태 전에 최연식 교수의 한국불교사 강의를 원격 수업으로 재미있게 들은 적이 있어 내심 자신이 있었다. 필자의 집요한 요청에 결국 최 교수가 강의를 수락했다. 

 

최연식 교수, 선각국사 도선의
실체를 설명하다

전자칠판을 활용한 원격 수업 진행이 처음이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최 교수는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선각국사 도선에 대한 색다른 이야기를 하겠노라는 선전포고로 강의의 문을 열었다.

첫 시간에는 옥룡사의 역사와 통진대사 경보, 선각국사 도선의 행적을 지금 남아 있는 비문을 중심으로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광양에 사는 우리가 아는 내용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이야기였다. 다른 점은 이야기의 순서였다. 필자는 물론이고 옥룡사 강의를 하는 대다수의 강사들은 스승인 선각국사 도선을 먼저 설명하고 다음으로 그의 제자라고 알려진 통진대사 경보를 설명한다. 

그런데 최 교수는 통진대사 경보를 먼저 설명했다. 필자의 짐작으로는 기록에 근거하여 연구하는 학자의 입장에서는 954년에 작성된 경보의 비문부터 먼저 얘기하고, 약 200년 뒤 1150년에 작성된 도선의 비를 얘기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무튼, 첫 시간 강의를 마치고 잠깐의 휴식 후 본격적인 도선 얘기가 시작됐다. 최 교수는 ‘통진대사 경보와 선각국사 도선의 관계’, ‘선각국사 도선은 실존 인물인가’, ‘선각국사 도선의 실체’, ‘옥룡사 선각국사 탑비의 건립 과정’을 주제로 그동안 광양에 사는 우리가 알고 있던 도선 얘기와는 다른 새로운 주장을 펼쳐놓았다. 

최 교수 강의는 차분했지만원격으로 수강하시는 분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강의 초반의 약간은 흥분된 질문부터 마지막 질의응답 시간에 답답한 심정의 토로까지 사회자인 필자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열띤 토론이 있었다. 대면 강의였으면 서로 민망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염려가 될 정도였다.     

서거정의 『동문선(東文選)』 목차 3책 표지(출처 :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서거정의 『동문선(東文選)』 목차 3책 표지(출처 :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선각국사 도선, 학계의 뜨거운 감자이다
학계에서 도선은 뜨거운 감자다. 문제의 핵심은 도선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도선이 입적하고 나서 252년이 지난 고려 의종 4년(1150) 최유청에 의해 찬술된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병서>(이하 도선비문)라는 점에 있다. 도선비문의 해석을 둘러싼 담론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도선을 곡성 태안사 동리산문의 개창자인 혜철의 법을 이은 위대한 선승이자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원조로 확신하고 있는 입장이다. 왕건의 출생과 고려 왕조의 개창을 예언한 신이의 고승이자 경보의 스승으로 도선을 자리매김하고 있다. 최병헌의 「도선의 생애와 나말여초의 풍수지리설」(『한국사연구』, 1975)이 대표적 논문이다.

『동문선』 목차 3책을 보면 117권 행장편에 최유청이 찬한 '선각국사비명(先覺國師碑銘)]이 있음을 알 수 있다.(출처 :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동문선』 목차 3책을 보면 117권 행장편에 최유청이 찬한 '선각국사비명(先覺國師碑銘)]이 있음을 알 수 있다.(출처 :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두 번째는 도선의 역사적 실존과 풍수지리와 관련된 행적에 관해서는 인정하지만, 나머지 내용은 부정하는 편이다.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의 존재와 권위를 빌려 왕건의 출생과 고려 창업의 정당성을 입증시킬 목적으로 왕명에 의해 최유청이 의도적으로 도선비문을 찬술한 것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정성본의 「선각국사 도선 연구」(『도선 연구』, 1999)가 대표적인 글이다.

세 번째는 아주 일부이기는 하지만 도선의 역사적 실존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이다. 최유청의 도선비문을 비롯한 도선 관계 사료들이 모두 태생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어 그 어느 기록도 믿을 수 없다는 견해다.

이번에 강의를 한 최 교수의 입장은 정성본의 견해를 좀 더 정밀하게 보완한 두 번째 입장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1990년대 후반에 나온 견해를 보강한 강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강하신 분들이 받은 충격은 가히 엄청난 것이었다.

서거정의『동문선(東文選)』 38책 표지(출처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서거정의『동문선(東文選)』 38책 표지(출처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각국사 도선,
옥룡사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자

필자는 광양지역史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옥룡사와 도선을 평생의 화두로 삼았다. 굳이 화두라고 표현한 이유는 아무리 공부해도 필자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자신이 없다는 자기 고백이기도 하다. 그래서 해결의 실마리를 외부에서 찾고자 한다.

먼저 전문 연구자들의 힘을 빌려보자. 옥룡사와 선각국사 도선, 그리고 통진대사 경보에 대한 최고의 연구자를 모시고 학술대회를 개최할 것을 제안한다. 그분들의 다양한 연구 성과와 견해를 들어보고 냉정하게 판단해 보자.

중단된 옥룡사 발굴을 다시 시작하자. 옥룡사는 순천대박물관이 1997년부터 2005년 봄까지 5차에 걸쳐 발굴하면서 많은 성과가 있었지만, 아직은 미완이다. 5차 발굴조사 때 주로 조선시대 유구가 확인됐으

『동문선』 38책 117권 행장편에 실려 있는 최유청이 찬한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白鷄山玉龍寺贈諡先覺國師碑銘)'의 첫 페이지이다. 선각국사비명의 전체 분량 8페이지이다.(출처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동문선』 38책 117권 행장편에 실려 있는 최유청이 찬한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白鷄山玉龍寺贈諡先覺國師碑銘)'의 첫 페이지이다. 선각국사비명의 전체 분량 8페이지이다.(출처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며, 그 아래 2미터 지점에 도선의 시기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됐다. 계속된 발굴을 통해 옥룡사와 도선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찾아내야 한다.

학술 연구와 발굴조사만큼 중요한 일이 남아 있다. 발굴 후 수습된 유물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보관·전시하기 위한 시립박물관 건립이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애써 찾은 유물이 타 기관에 소장되거나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현실이 된다. 1997년 출토된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관과 유골이 2002년 다시 옥룡사 탑비전지에 매장되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제공=이은철 광양지역史연구회 ‘마로희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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