묏자리 표시한 산도(山圖)통해 재확인
서극수 선생…도선비유지 바로 위 자리

호남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호남 3걸’로 일컫는 봉강출신 신재 최산두. 그의 스승이 옥룡사지 백계동 묘역에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이를 입증하는 산도(山圖)가 발견돼 오늘 광양시민신문에 의해 공개된 것이다. 이는 1700년대 발행된 이천서씨 ‘묘원’에 따른 것으로 이곳이 서극수 선생의 ‘묘역’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셈이다. 
특히 이번 묏자리를 표시한 산도(山圖) 발굴은 고지도로서 당시 옥룡사지와 추산리 지역의 주요 산 이름과 폐사된 사찰 등이 명기돼 있어 향토사적으로도 이야깃거리가 될 전망이다. 

서극수 선생의 ‘묘원도’…‘옥룡사지’와 ‘도선비유지’가  현재 장소와 일치한다.
서극수 선생의 ‘묘원도’…‘옥룡사지’와 ‘도선비유지’가 현재 장소와 일치한다.

묘원이 발굴되기까지

이야기는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천서씨 원숙공파 광양종중은 지난 2003년 개정증보판 족보를 발행한다. 편찬 및 수보사업(修譜事業)의 일환이었는데, 족보 명칭은 ‘2003년 계해(癸亥) 이천서씨 원숙공파 보’였다. 발행인은 현 광양한의원 서명진 원장의 부친인 서병주(89) 어르신이다. 그러나 당시 편찬에 참여했던 진월의 서홍영 도유사와 부유사인 중동의 서연식. 총무인 남정의 서장식 이 세 분은 현재 작고했다. 또 지난해까지 종중 회장을 지낸 대방의 서병의(84) 어르신과 서용식(78) 전 광양시의회 의장은 각각 교정과 감수에 참여했었다. 

그렇게 3년이 흐른 지난 2006년 3월께. 필자는 종중 임원인 서연식, 서병주, 서장식 이들 세 분의 안내로 옥룡사지 옆 도선비유지 바로 위에 자리한 서극수 선생의 묘역을 답사했다. 그런데 순간 필자의 눈을 의심했다. 위 사진처럼 말 그대로 묘역인지 아닌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형체가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를 묻는 질문에 다들 미안한 표정이 역력한 가운데 종중이 오랜 동안 금기시해 온 저간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언제 어느 때부터인지는 모르지만 후손 한 사람이 벌초를 한 후 안 좋은 일이 일어났는데, 혹여 이 때문은 아닌지 노심초사 끝에 그 후로는 벌초는커녕, 묘지 인근에도 안 가는 기현상이 오늘에 이르러 결국 이렇게 됐다는 것. 

서극수 선생의 묘지. 이처럼형체를 알아 보기 힘들 정도다.
서극수 선생의 묘지. 이처럼형체를 알아 보기 힘들 정도다.

이런 연유를 접한 필자는 당시 지역신문에 몸담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최산두 선생의 스승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려내야 한다는 의무감에 이천서씨에 대해 두세 차례 기사를 내보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자신이 이천서씨 원숙공파로 옥룡 석곡마을이 고향인데 현재는 부산 다대포에 살고 있다, 집에 이천서씨 원숙공파 관련 고문서 등을 보관하고 있다’는 낭보였다. 이후 소장자의 집에서 만남이 이뤄졌다. 오늘 공개한 서극수 선생의 ‘묘원’을 비롯, 서씨 집안의 과거급제 교지와 조선후기 옥룡서당에 다닌 학생들의 명단 등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서극수 선생의 ‘주부공묘도’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주부공묘원’으로 본 지역 주요 지명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먼저 광양시에서 백계산 둘레길에 세운 ‘세우암’ 표기는 ‘세운암’으로 고쳐야 할 것을 주문한다. 사실 지난 87년 발행한 ‘광양군 마을 유래지’와 93년 광양군과 순천대박물관이 펴낸 ‘광양군의 문화유적’에도 이미 폐철된 그 절터는 ‘세운암’이라고 특정 지었는데도 왜 지금껏 ‘세우암’이라고 홍보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광양시민신문이 처음 공개한 이번 ‘묘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곳은 ‘세운암동’ 마을이었다는 것을 알려내고 있다.

표기된 진상 곰골의 ‘웅치’와 백운산 아래 ‘팔각산’ 지명도 관심거리다. 역사적 자취가 남아 있는 자리인 ‘옥룡사지와’ ‘도선비유지’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도 옥룡사지였으며 ‘백계동 마을’로 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도선비유지’와 함께 현재 그 자리에 꿋꿋이 있었음이 확인된 것이다, 

그동안 양산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전해오던 ‘산음사지’는 실지 특정한 금목산 아래 ‘입봉’앞에 자리한 것으로 나타나 있어 주민들의 증언이 사실인 것으로 보여 진다. 하산마을 개울 건너 밭에서 기왓장이 나오고 있는 그곳이다. 

옛날 묘원은 대부분 풍수에 기인한 것을 산도(山圖)로 그려 조상들의 묏자리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 지금의 지도로서 묘지를 찾는 네비게이션과 같다고 하면 이해가 빠르다. 

이처럼 서극수 선생 ‘묘원’ 또한 ‘옥룡 백계산 임좌(壬坐)에 옥룡사지 바로 옆 ‘도선비유지’바로 위에 ‘을득곤파’, ‘맹호출림’으로 조성했다고 안내하고 있다. 추동마을 아래 ‘북수귀범’은 ‘백운산과 세운암동 북쪽의 아래로 흐르는 물이 봉화산 아래 남쪽으로 돌아서간다’ 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최근에야 서씨 종중이처럼 비를 세워 서극수 선생의 묘역임을 알리고 있다.
최근에야 서씨 종중이처럼 비를 세워 서극수 선생의 묘역임을 알리고 있다.

옥룡사지와 함께 관광자원화 나서야

서극수 선생은 최산두 선생의 스승이자 장인이다. 이천서씨 족보와 최산두의 과거급제 방목이 이를 증명하고 있고, 초계 최씨인 최산두 족보에도 분명히 명기하고 있다. 서극수 선생은 1429년 옥룡 남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그의 부인은 풍천 노씨이다. 그는 1496년 10월 4일 67세를 일기로 졸했는데 ‘대대로 고을에 큰 인물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최산두는 6살 때 서극수 선생에게 글공부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봉강 저곡마을에서 옥룡운평으로 향하는 ‘산성재’를 넘어 남정마을 서쪽 ‘가무갯재’를 지나야만 비로소 서극수 선생에게 다다를 수 있었다. 그만큼 서당 가는 길이 험했다. 이때 잘 알려진 일화가 바로 ‘상여집 피신’이다. 최산두가 어느 날 서당에 가기 위해 남정을 향하는 ‘가무갯재’를 지날 때 비를 만나 상엿집에 잠시 피신했다. 그때 도깨비들이 몰려와 그를 보고는 사인(舍人. 정4픔 벼슬)이 왔다고 수군거리더라는 것. 이윽고 서당에 도착한 어린 최산두는 서극수 선생에게 이를 알렸더니 서극수 선생이 글공부를 더 열심히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후 서극수 선생은 8년 만에 자신의 딸과 결혼시켰다. 그를 사위로 삼은 것이다. 그의 나이 14살이었다. 

이렇듯 최산두의 유년기 학풍은 서씨 집안을 피할 수 없다. 서열은 서극수 선생의 장남으로  매제인 최산두와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됐다고 읍지는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일찍이 벼슬에 올라 적순부위(정칠품)에 이르렀으나 ‘연산의 황난’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 옥룡으로 돌아와 백운산에 은거했다.
다음에 다룰 것이지만 서열 선생의 둘째 아들은 천일(千鎰·1483-1561)로 암연처사다.

이제는 동백림에 쓸쓸히 잠들어 있는 최산두 선생의 어릴적 스승인 서극수 선생을 알려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주거지를 근거로 깊이 연결돼 있는 초계 최씨인 최산두와 이천 서씨인 서극수 가(家)의 혼맥 관계가 어떻게 형성돼 오늘에 이르게 됐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있었다. 

오늘부터는 ‘옥룡사지’와 ‘도선비유지’ 그리고 ‘동백림’과 연계한 서극수 선생의 묘역은 한층 더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음 호에는 호남정맥을 갈무리 하는 ‘망덕산’과 ‘천황봉’ 일대를 재조명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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