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정’과 ‘서재’, ‘사선대’ 등 전체가 박물관
‘서시과차’ 새긴 ‘삼록바위’ 도로공사로 유실

‘망덕산’이 ‘고향’인 사람들이 있다. 실제 그곳에서 대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망덕산이 고향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광주에 사는 강순길(61) 씨는 “고향은 우리들의 이름이자 단어이며, 강한 힘을 지닌다. 그래서 망덕산이 고향이기에 자랑스럽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렇다 ‘고향’은 어떤 마법사가 외는 그 어떤 주문보다도 혹은 영혼이 응하는 어떤 주술보다 강하다.

강처중·강한주·강순길·조경제·장상진·이춘기·조종문·허영훈·김태선·황석현·이재준·이경일 씨 등 그들이 망덕산에 살면서 바라본 섬진강의 모습은 이랬다. 망덕포구엔 부산과 하동을 오가는 화물선인 ‘일광호’가 구경거리였다. 짐꾼들이 돼지와 생필품을 어깨에 지고 배에 싣고 나르는 등 그곳은 구경꾼들이 뒤섞인 그야말로 시골 장터를 방불케 했다.

또한 부산 등지에서 입항한 각종 모래 채취선과 난치선(예인선)이 빼곡히 정박해 있고, 강 건너 떼(잔디) 밭 등에는 은빛 실 모래가 눈물인 듯 반짝이는 풍경을 목도했다. 그렇게 꿈을 키우며 살았다. 산 아래 사는 사람들 또한 망덕산을 오르지 않은 사람이 없다. 소풍장소 1번지이자 매똥(산소) 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놀이터였다.

호남정맥의 지맥이 결국(結局)을 이룬 망덕산

197m의 낮은 산이지만 지난 1천년 동안 수많은 기인과 풍수가들이 비상한 관심을 가지며 답사를 오는 산이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호남정맥인 전북 완주의 만덕산(762m)에서 내려온 맥이 정읍 내장산을 거쳐서 담양 추월산 무등산-장흥 제암산, 사자산-순천 조계산-광양 백운산(1222m)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백운산의 지맥이 남쪽으로 내려가 안착한 곳이 바로 망덕산인데, 그곳에 천자봉조혈(天子奉朝穴)이 있어 각종 묘지가 즐비하게 조성돼 있다. 

천자봉조혈은 ‘왕비(王妃)가 날 자리’라고 의미를 둔다. 바로 뒤 천황산은 이름 그대로 왕을 상징하고 있으며 배알도(사도)를 바라보는 ‘양산등’은 ‘시녀가 왕비에게 양산을 받쳐 보좌하고 있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한자로는 양산등(陽山嶝)으로 ‘볕이 잘 드는 고개’인데 언제부터 그렇게 전해져 오는 것일까. ‘배알도’ 역시 사도(蛇島)로서 ‘뱀섬’이 타당한데, ‘배알도’라고 이름 붙여 오늘에 이른 것 일까. 

안타까운 것은 ‘삼록바위’가 유실됐다는 것이다. ‘양산등’ 넘어 ‘가맷등’밑 지맥이 뻗은 곳에 자리했던 삼록바위(三祿石)는 오랜 전설을 간직한 곳으로, 지역민의 추억이 깃든 명소였다. 이런 명소가 최근 망덕-광영간 도로 개설 중에 흔적도 없이 유실돼 뜻있는 이들이 애석해 하고 있다. 

삼록바위(三祿石)에 깃든 전설은 이렇다. 중국 진시황이 오래 살고 싶어 불로초를 구해 오라고 서시(徐市) 일행을 망덕산으로 보냈는데, 찾지 못하고 다음 행선지인 일본을 향한 장소가 바로 이 ‘삼록바위’라는 것이다. 이후 그곳을 떠난 삼록바위에는 ‘서시과차(徐市過此)’ 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서시 일행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표식이다. 

이 같은 전설은 전국에 널리 퍼져있는 ‘전우치 전설’과 흡사하다. ‘서시과차’라는 암각은 부산 문현동과 제주 장방폭포 절벽, 거제 해금강, 남해 상주 등에도 새겨져 있어 해당 지자체가 이를 관광자원화 하고 있다. 얘기는 비슷하지만, 내용은 흡사하다. 

상식선에서 있지도 않은 불로초를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허망한 얘기지만 이것이 스토리텔링이다. 진시황은 마흔 살을 겨우 넘기고 죽고 말았다.

 

‘상사암’과 ‘서재’, 그리고 ‘반구정’

조선시대에는 사찰인 ‘상사암’이 존재했다. 언제 폐사됐는지는 모르지만, 진월면이 월포면과 통합하기 전인 ‘진하면’ 일 때 ‘상사암’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근대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서당이 있었던 약수터 옆이다.

최근 진월면이 명명한 반구정(伴鷗亭)은 부호군을 지낸 이채한(李採漢)이 세웠다. 섬진강 하구 망덕포구와 많은 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를 자신의 호를 붙여 만년을 보낸 곳이다.

반구정에는 반구정기(記)가 전하고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이며 조선 후기 문신으로 예조판서와 이조판서, 우찬성 등을 지낸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1728∼1807)가 지었다.

백구(白鷗)는 강호(江湖)의 새다. 강호에서 나서 강호에서 자라고 배고프면 강호의 물고기를 먹고, 목마르면 강호의 물을 마시며 한가하니 놀고, 스스로 즐기면서 오래도록 강호사이에서 지내니 이런 이유로 강호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백구를 짝으로 삼는다.

지금 처사 이채한은 천성이 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강가에 정자를 세워 ‘반구정’이라고 이름 했다. 한 칸 모옥의 그림자 강으로 떨어지니 백구가 쉬는 모래탑이다. 오호, 반구라는 이름이 헛되이 얻은 것이 아니다.-중략-

“강남 들판 흐르는 물은 하늘보다 더 푸른데, 한 마리 백구는 한가하니 나와 같네” 승정 기유년(1789년)은진 송씨 송환기(宋煥箕)가 쓴다.

광양시는 이 전문을 최근 진월면이 복원한 ‘반구정’에 전재해 관광 자원화에 나서기 바란다.

3대가 운영한 유서 깊은 서당

망덕산에는 ‘서당’과 ‘한약방’이 있었다. 약수터 앞에 자리한 서당은 강처중(1881년생)훈장이 조부의 대를 이어 3대째 이어 온 훈장 가족이다. 그는 망덕리 출신으로 호는 백암(柏庵) 이며 어려서부터 사서(四書)를 숙독해 덕망이 높고 문장이 출중했다.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15세에서 20세에 이르는 고을 청소년들에게 문맹퇴치 일환으로 사재를 털어 서당을 짓고 무료로 교육시킨 덕망이 높은 한학자였다. 후세 교육에 공헌했으며 저서로는 유년하습, 인물총논, 동국약사 등이 있다. 

서당 자리 바위에는 ‘우당’이라고 새겨져 있다. 우당은 용소 출신 한학자 박종범(1898) 선생의 호이다. 그는 1969년 전국백일장에서 한시부문 장원에 올라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후 전국백일장 사관으로 추대됐으며, 광양향교 제18대 전교로서 희양문헌집 4권을 저술했다. 그 역시 선배인 강처중의 요청으로 망덕서당에 초대돼 학동들에게 특강을 하기도 했다. 또한 강처중 선생은 후배 박종범 전교와 함께 망덕의 정병욱 학생(훗날 서울대 교수)에게 ‘맹자’와 ‘고문진보’를 잠시 가르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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