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 전 12월, 광양시가 주관한 <중흥산성쌍사자석등 학술대회>에서 필자는 ‘석등의 반출과 반환, 그리고 현재’를 발표했다. 조선총독부가 중흥산성쌍사자석등의 광양 반출을 결정한 지 100년이 되는 2031년 12월 17일, 그날이 오기 전 중흥산성쌍사자석등의 귀향을 소원하면서 ‘국립박물관에 버금가는 시립박물관의 건립’을 제안했다. 

벌써 15개월이 지났으나 아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요즘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유행이다. 뒤집어 보면 ‘아무 말을 하면, 아무 일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시립박물관 건립을 촉구하는 글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재하고자 한다, 시립박물관 건립이 결정되는 그날까지. 

진월면 진목마을 운강장 전경
진월면 진목마을 운강장 전경

첫 번째 글은 진월면 진목마을 운강장(雲岡莊) 이야기이다. 운강장은 순흥안씨 집안의 고택으로 진목마을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전성기엔 1천여 평의 넓은 터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 여러 채가 처마를 맞대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안채와 별채, 그리고 아래채 일부만 겨우 남아 있다. 그나마도 오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많이 허물어진 상태이다. 학술조사와 보존을 위한 대책이 시급하다.

문간채 운강장 전경
문간채 운강장 전경
운강장 편액
운강장 편액

얼마 전 필자가 운강장을 방문했을 때 후손 안정주 님은 집안에 보관하고 있는 각종 교지와 시권 등 귀한 고문서를 보여주었다. 광양의 고택에서 고문서를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고문서 중 우선 눈에 띄는 교지 몇 점의 사진을 찍었다. 집에 돌아와 사진 속 내용을 확인하며 운강장이 역사 속에서 가장 잘나가던 때는 19세기였음을 알 수 있었다. 운강장 집안의 후손인 안창범(昌範, 1835~1888)이 1875년에 과거에 합격한 홍패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과거 합격은 출세의 사다리에 오른 것을 의미한다. 안창범은 문과 급제 후 보란 듯이 사간원 정언(정6품)과 사헌부 지평(정5품)을 역임했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20년(1883)에는 안창범이 사헌부 지평으로 재직 당시 양사(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료들과 함께 상소를 올린 기록이 남아있다.

안창범이 1875년 41세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는 세 개가 남아있다. 교지와 국조방목, 그리고 순흥안씨 참찬공파 족보이다. 

조선후기 광양 유일의 문과급제자, 안창범

안창범의 과거 급제 교지, 홍패
안창범의 과거 급제 교지, 홍패

먼저 교지를 살펴보자. 교지는 조선시대 국왕의 명령(敎) 및 의중(旨)을 담은 문서군을 의미한다. 여러 교지 중 과거합격증서는 홍패와 백패, 두 종류가 있다. 홍패는 과거에 급제한, 백패는 생원․·진사에 입격한 자에게 발급한 교지이다. 안창범의 경우 홍패가 남아있다.

안창범의 홍패에는 ‘교지 유학안창범위문과병과제5인급제출신자 광서원년5월 일(敎旨 幼學安昌範爲文科丙科第五人及第出身者 光緖元年五月 日)’이라고 적혀 있다. 아직 관직을 얻지 못한 유생 안창범이 광서원년(고종12, 1875)에 실시한 문과에 병과 제5위로 합격했음을 입증하는 교지이다. 이 교지가 위조된 것이 아니고 진본임을 입증하는 것은 ‘원년(元年)’ 윗부분에 찍혀 있는 보인(寶印)이다. 오랜 세월 속에 빛이 바래어 도장의 붉은 색이 많이 바래었지만 ‘과거지보(科擧之寶)’일 것으로 추정된다.

안창범의 문과 급제를 입증하는 두 번째 자료는 국조방목(國朝榜目)이다. 국조방목은 조선 시대 문과 급제자를 연대순으로, 시험 종별로, 그리고 성적순으로 수록한 명부이다. 현재 10여 부의 국조방목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만든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에는 1만5151명의 문과 급제자가 수록돼 있다. 이중 거주지가 광양으로 분류된 인원은 4명이다. 전체의 0.026%에 해당된다. 최산두(1483~1536), 박문룡(1523~?), 허수겸(1563~?), 안창범(1835~1888)이 바로 영광의 주인공들이다. 조선 후기 급제자로는 안창범이 유일하다. 

『국조방목』 권11(奎貴11655) 광서원년(1175) 별시문과 전시방의 병과 5인 안창범(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공)
『국조방목』 권11(奎貴11655) 광서원년(1175) 별시문과 전시방의 병과 5인 안창범(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공)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보관된 『국조방목(奎貴11655)』 권11의 ‘을해12년 친림춘당대 왕세자책례경과 별시문과전시방(乙亥十二年親臨春塘臺王世子冊禮慶科別試文科殿試榜)’을 보면, 안창범이 1875년 왕세자를 책봉한 경사로 시행한 경과 별시에서 병과 제5위로 합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갑과 1명, 을과 3명, 병과 30명을 선발했는데, 안창범은 전체 34명의 급제자 중 9등으로 합격했던 것이다. 

이러한 안창범의 과거 급제 사실은 순흥안씨 참찬공파 족보에도 당연히 실려 있고, 앞의 교지와 국조방목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순흥안씨 집안의 최고 영광의 기록이 족보에 실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도광24년(1844) 안국신 교지
도광24년(1844) 안국신 교지

안국신, 장수한 덕분에 두 번 노인직을 받다
한편, 유교적 경로사상이 투철했던 조선은 80세 이상 장수한 노인에게 양인이나 천인을 막론하고 노인직(老人職)을 제수했다. 직임이 없는 관직이라고 산직(散職)이라고도 하고, 장수한 덕분에 받은 벼슬이라고 수직(壽職)이라고도 했다. 안국신이 바로 노인직을 받은 인물이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함풍4년(1854) 안국신 교지
함풍4년(1854) 안국신 교지

안국신은 90세가 되던 해인 도광 24년(1844)에 정3품 통정대부의 교지를 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100세가 되던 함풍 4년(1854)에는 문관 종1품 하(下)의 품계인 숭정대부, 종2품의 관직인 동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지만, 그해에 졸하였다. 하지만 교지의 나이는 순흥안씨 참찬공파 족보의 생몰년보다 10살 많게 기록돼 있다. 순흥안씨 족보에는 안국신의 생몰년이 1765~1854로 기록되어 있어, 1844년에 80세, 1854년에 90세이다.

교지와 족보, 두 기록 중 어느 것이 더 정확한지는 좀 더 철저한 고증이 필요한 것 같다. 아무튼, 안국신은 두 번의 노인직을 하사 받았지만 실직(實職)이 아니었기에 손자 안창범의 시권(과거 시험 답안지) 봉미 부분에 안국신은 벼슬하지 않은 ‘학생(學生)’으로 기록돼 있다.

함풍4년(1854) 안국신 처 윤씨 교지
함풍4년(1854) 안국신 처 윤씨 교지

안국신의 장수는 본인뿐만 아니라 부인과 이미 돌아가신 증조부와 증조모에게도 혜택이 돌아갔다. 안국신의 세 번째 부인 윤 씨는 2품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던 봉작인 정부인(貞夫人)을 제수받았다. 증조부 안익형(1700~1725)은 정5품의 통덕랑에서 정3품의 통훈대부 군자감정을, 증조모 오 씨는 숙인의 품계를 추증받았다. 조상의 건강한 유전자 덕분에 후손은 백년장수를 누리고, 장수한 후손 덕에 조상의 품계가 추증되었던 것이다. 미상불 겹경사였다.

함풍4년(1854) 안국신 증조부 안익형 교지
함풍4년(1854) 안국신 증조부 안익형 교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진목마을의 순흥안씨 고택인 운강장에서 필자가 확인한 교지만도 10여 장이었다. 그밖에도 안창범 본인은 물론 부친과 아들, 즉 안영규와 안기묵의 시권도 있었지만, 이번에 모두 살피지 못했다. 하루빨리 고문서 전문가의 손길이 닿기를 기원한다.

필자가 순흥안씨 집안의 교지에 대한 글을 쓰면서 느낀 소회는 한마디로 ‘정말 안타깝

함풍4년(1854) 안국신 증조모 오씨 교지
함풍4년(1854) 안국신 증조모 오씨 교지

고 너무 창피하다’는 것이다. 그동안 광양의 누구도 이 소중한 자료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고문서를 보관할 시설이 없는 고택에 사실상 방치돼 있다는 것이 정말 안타깝다. 설사 누군가 그 가치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광양 어디에도 고문서를 보관하고 연구해 시민에게 홍보할 기관이 없다는 것이 너무 창피하다. 

광양의 고문서가 사라지기 전에, 또 외부 기관으로 유출되기 전에 광양에 사는 우리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 한번 유출된 문화재가 다시 광양으로 돌아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중흥산성쌍사자석등’을 통해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그 준비는 바로 ‘광양시립박물관’ 건립이다.

제공=이은철 광양지역史연구회 ‘마로희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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