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범의 첩과 교지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명부인 국조방목(國朝榜目)에는 거주지가 광양으로 표기된 이가 4명 있다. 이중 마지막으로 급제한 인물이 운강장의 안창범(1835~1888)임을 지난 3월의 운강장의 고문서 1’에서 소개하였었다. 이번에는 문과 급제 후 안창범의 관직 진출과 승진 과정을 보여주는 ()’교지(敎旨)’를 살펴보고자 한다.

문과 급제, 등수가 중요하다

모두가 알다시피 조선은 양반 중심의 신분제 사회였다. 하지만 양반 신분이 대를 이어 영원히 보장되지는 않았다. 양반이 벼슬하지 못한 채 3대를 지나면 몰락 양반, 즉 토반(土班)으로 전락하였다. 양반 신분 유지를 위해 벼슬에 나아가기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은 과거 급제였다.

그래서, 조선의 양반들은 비록 그들끼리의 리그였지만 과거라는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내야만 했다. 양반의 유일한 직업은 관직이었다. 비록 놀며 지낼지언정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았다. 오직 과거 급제만이 살길이었다. 그것도 이왕이면 좋은 성적으로 급제하여야 했다.

과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전시(展試)는 문과의 마지막 단계로 이미 과거 합격이 결정된 33인의 순위를 정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시자의 입장에서는 설렁설렁 볼 수 있는 시험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합격 순위에 따라 관직 생활의 시작이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문과 합격자 33인의 등급은 갑과 3, 을과 7, 병과 23인으로 나누었다. 갑과 3명은 다시 1, 2, 3등으로 세분되었다. 이들을 각각 장원(狀元), 방안(榜眼), 탐화(探花)라고 이름하였다. 이렇게 순위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달리 이름하는 이유는 주어지는 품계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갑과 제1인 급제자, 즉 장원에게는 종6, 2인 방안과 제3인 탐화에게는 정7, 을과 급제자에게는 정8, 병과 급제자에게는 정9품의 품계를 주었다.

또한, 갑과 3인에게만 즉시 실직(實職, 실제의 관직)을 주었다. 나머지 급제자들은 교육·문예를 담당하던 사관(四館), 즉 성균관·교서관·승문원·예문관에 배치하여 권지(權知, 임시직 혹은 비정규직)를 시켰다. 이를 사관분관(四館分館)이라 한다. 이후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 거관(去官, 임용) 시키는 것이 관례였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급제자가 적체되어 권지로 임명된 뒤 보통 6, 7년을 기다려야 9품 실직에 임용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관직 수보다 너무 많은 급제자가 쏟아져 나왔으므로, 평생을 권지로 지내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에 비해 갑과 3인 급제자는 권지를 지내지 않고 바로 임용되어 초고속으로 승진하였으니, 어찌 등수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안창범, 비정규직으로 벼슬을 시작하다.

18755, 안창범은 왕세자를 책봉한 경사로 시행한 별시에서 병과 제5위로 합격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식년시와는 달리 당시의 별시에서는 갑과 1, 을과 3, 병과 30명을 선발하였는데, 안창범은 전체 34명의 급제자 중 9등으로 합격하였다. 중상의 괜찮은 성적이었지만 갑과가 아닌 병과에 속하였다.

그래서, 바로 실직으로 나가지 못하고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에 임명되었다. 이때 이조(吏曹)로부터 받은 첩()이 운강장에 보관되어 있다. 비록 종9품의 임시직이었지만 과거에 급제한 당해 년에 벼슬길을 바로 시작했으니 얼마나 설레었을까.

안창범의 ‘권지성균관학유’ 첩(1875)
안창범의 ‘권지성균관학유’ 첩(1875)

이후 안창범의 벼슬 생활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187710월에는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다. 당시의 첩도 운강장에 남아 있다. 이 첩의 담당자였던 동부승지(同副承旨) 유만원(兪晩源)1857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인물이었다. 급제 20년 만에 승정원의 정3품 당상관직인 동부승지에 오른 것이다.

 

안창범의 ‘권지승문원부정자’ 첩(1877)
안창범의 ‘권지승문원부정자’ 첩(1877)

과거 합격자의 권지 임명은 급제자들의 연령과 재능에 따라 이루어졌다. 급제자의 분관은 향후의 출세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것이었는데, 홍문관을 첫째로 승문원을 다음으로 꼽았다. 안창범은 권지의 두 번째 요직인 승문원으로 자리를 옮겼으니 영전이었다. 물론 아직은 권지라는 꼬리표도 떼지 못한 종9품의 말단 관직에 지나지 않았다.

안창범, 5품의 사헌부 지평에 오르다

권지로 관직을 시작한 안창범이 드디어 실직에 임명되었음을 보여주는 교지 3점이 운강장에 보관되어 있다. 18831, 안창범은 통훈대부 행 성균관 전적(通訓大夫行成均館典籍)과 선략장군 행 용양위 부사과(宣略將軍行龍驤衛副司果)에 임명되어 문무관을 겸직하였다.

통훈대부는 문신 정3품의 품계이고, 성균관 전적은 정6품의 관직이다. 선략장군은 종4품 무신의 품계이고, 용양위 부사과는 종6품의 무관직이다. 이처럼 품계가 높고 관직이 낮은 경우 관직명 앞에 을 붙인다. 1875년 문과 급제 후 종9품 임시직 관직으로 시작한 안창범이 급제 8년 만에 정6품의 정규직 관직에 올랐으니 정상적인 승진 과정을 거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

18837, 안창범은 통훈대부 행 사헌부 지평(通訓大夫行司憲府持平)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1월 받은 통훈대부의 품계는 그대로였지만, 관직이 정5품의 사헌부 지평으로 오른 것이다. 순흥안씨 족보에는 성균관 전적과 사헌부 지평 사이에 정6품의 사간원 정언을 역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사간원 정언으로 임명된 교지는 남아 있지 않다.

안창범의 ‘통훈대부행사헌부지평’ 교지(1883)
안창범의 ‘통훈대부행사헌부지평’ 교지(1883)

그러면, 안창범은 언제까지 사헌부 지평의 관직을 수행하였을까? 그 시기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다. 안창범의 아들인 기묵이 1886년 생원시에 응시한 시권이다. 이 시권 봉미의 사조단자에 부 통훈대부 전 행 사헌부 지평 창범(父通訓大夫前行司憲府持平 昌範)’이라 적혀 있는데, 1886년 당시 안창범이 사헌부 지평에서 물러나 있었음을 ()’을 통해 알 수 있다. 어떤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안기묵의 ‘생원시 시권(1886)’ 봉미의 사조단자
안기묵의 ‘생원시 시권(1886)’ 봉미의 사조단자

안창범이 과거에 급제한 이후 비정규직 권지로 시작해 사헌부 지평으로 승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첩과 교지들이 사실상 방치되어 있다. 188854세의 나이로 삶을 마치면서 고위직으로 승진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지만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한 관리들의 표준적인 관직 생활을 보여주는 소중한 역사 자료이다. 광양를 통해 한국를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니 미상불 안타깝다. 만시지탄(晩時之歎)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은철 광양지역연구회 마로희양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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