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시립박물관 건립을 위한 제언’ 첫 번째 글에서 진월 진목마을 순흥안씨 운강장이 소장하고 있는 교지를 소개했다. 이번에는 운강장이 소장하고 있는 시권(試券)을 살펴보고자 한다. 운강장은 무려 5장의 시권을 보관하고 있다. 1875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안창범의 시권 2장, 그의 부친인 영규의 시권 2장, 그의 아들인 기묵의 시권 1장이 남아 있다. 놀라운 일이다.

조선, 합격자에게 시권을 돌려주다
시권이란 과거 응시자들이 제출한 답안지이다. 조선 시대에는 과거 결과를 발표한 후 합격자의 시권은 본인에게 돌려주고, 불합격자의 시권은 여러 관서로 보내 재활용하도록 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현재 수많은 과거 합격자의 시권이 남아 있으니 사실이다. 운강장에 있는 5장의 시권도 이를 증명하고 있다.

시권의 중요성은 이를 통해 조선의 과거 제도는 물론이고 시대적 상황과 고민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문과 응시자가 시권을 작성하고 시험관이 채점하는 과정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과거 응시자는 시지(試紙)를 직접 구입했다. 국가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하지만 시지의 크기와 품질은 과거의 종류에 따라 국가가 일정한 규격을 정해 놓았다. 개인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시권의 품질이 달라 채점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시지를 구입한 응시자는 녹명(錄名)의 절차를 밟았다. 과거 응시 자격을 심사받고 응시자로 등록하는 절차이다. 이때 응시자는 시지 오른쪽에 본인과 사조(四祖, 父·祖父·曾祖父·․外祖父)의 인적사항을 기재하고 녹명단자와 함께 제출했다. 녹명관은 이를 심사한 후 시지의 인적사항을 적은 부분은 봉하고 그 위에 확인 도장을 찍어 돌려주었다. 이와 같이 시지의 봉한 부분을 피봉(皮封)이라 한다. 

과거 당일 응시자가 답안지를 작성한 후 제출하면 작축(作軸)의 과정을 거쳤다. 답안지 10장씩을 한 축으로 묶었는데, 각 축의 시권은 천자문 순서로 자표(字標)를 매겼다. 즉, ‘1천(一天)’, ‘2천(二天)’, ‘3천(三天)’과 같은 방식으로 기록했다. 답안과 피봉 부분을 나누어 채점할 때에는 답안과 피봉 사이의 중간 3곳에 자표를 매겨 나중에 다시 붙일 때 확인하는 징표로 삼았다. 이처럼 채점을 시작할 때 피봉을 답안에서 잘라내어 따로 보관하는 것을 할봉(割封)이라 한다. 피봉을 분리하지 않을 때는 한 곳에만 자표를 기록했다.

이처럼 과거의 공정함을 담보하기 위해 피봉, 할봉 등의 장치를 하였음에도 또 하나의 과정을 마련했다. 바로 역서(易書)이다. 답안의 필체를 통해 작성자를 알아보는 경우에 대비해 응시자의 답안을 모두 베껴 복사본으로 채점하도록 한 제도이다. 그야말로 이중삼중의 장치를 마련해 부정을 방지했다. 조선은 치밀한 시스템을 갖춘 나라였다. 

안창범, 별시 문과 초시와
전시의 시권을 돌려받다 

안창범(昌範, 1835~1888)은 1875년 왕세자 책봉을 축하하기 위해 시행한 별시 문과에서 병과 제5위로 합격했다. 이때 안창범이 작성한 시권 2점이 남아 있다. ‘의주군신하일유원량만국이정(擬周羣臣賀一有元良萬國以貞)’이라는 제목의 표(表)와 ‘전라도 방가지기(全羅道 邦家之基)’라는 제목의 부(賦)이다. 이중 표는 별시 문과 초시의 시권이고, 부는 전시의 시권이다. 

2점의 시권 모두 오른쪽 피봉 부분에는 안창범 본인과 사조의 인적사항이 적혀 있다. 1875년 당시 유학(幼學, 벼슬하지 않은 유생)이었던 안창범의 나이는 41세, 본관은 순흥, 거주지는 광양이었다. 4조 역시 모두 벼슬하지 않은 유생이었다.

안창범 별시 문과 초시 시권 ‘표(表)’
안창범 별시 문과 초시 시권 ‘표(表)’

초시 시권의 피봉과 답안 사이에 ‘2흥(二興)’의 자표가 있다. ‘흥(興)’은 『천자문』의 66번째 절구로 숙흥온청(夙興溫凊)에 나온다. 그러니까 『천자문』에서 262번째 글자이다. 10장을 1축으로 묶었으니 결국 ‘2흥(二興)’은 2612번째로 시권을 제출했음을 의미한다. 안창범이 응시한 1875년의 별시 초시에 최소한 수천 명이 응시했음을 보여주는 수치이다. 별시 문과 초시의 선발 인원이 300인 또는 600인이었으니, 경쟁이 매우 치열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초시 시권의 앞부분에는 차상(次上)이란 글씨가 붉은색으로 기재돼 있다. 일반적으로 과거의 시험 점수는 9등급 내지 12등급으로 합격자를 정했다. 다시 말하면 상상(上上), 상중(上中), 상하(上下), 이상(二上), 이중(二中), 이하(二下), 삼상(三上), 삼중(三中), 삼하(三下), 차상(次上), 차중(次中), 차하(次下)로 표시했다. 안창범은 중간 이하인 차상(次上)의 성적으로 별시 초시를 통과했던 것이다. 

초시를 통과한 안창범은 전시에 응시해 ‘전라도 방가지기(全羅道 邦家之基)’라는 제목의 부(賦)를 제출했다. 이 전시 시권에는 ‘9천(九天)’이라는 자표가 있어 안창범이 9번째로 답안지를 제출했음을 알 수 있다. 갑과 1인, 을과 3인, 병과 30인을 뽑았던 당시 별시에서 안창범은 병과 5위, 즉 전체 9위로 합격했는데 답안지를 제출한 순위와 같다. 답안지를 제출한 순위가 중요하다는 속설과 일치해 재미있다. 

안창범 별시 문과 전시 시권 ‘부(賦)’
안창범 별시 문과 전시 시권 ‘부(賦)’

또한 전시 시권에는 ‘3중(三中)’이라는 성적이 기재돼 있다. 안창범은 별시 문과 전시에서 최종 합격했기에 그의 시권에는 ‘삼중’ 윗부분에 최종 성적인 ‘왕세자책례경과별시 전시병과제오인망(王世子冊禮慶科別試 展試丙科第五人望)’이 별지로 기재돼 있다. 과거 합격자에 대한 국가의 예우라고 할 수 있겠다. 응시자에게는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다.

안창범의 아버지와 아들
생원 초시의 시권을 돌려받다

안창범이 과거에 합격한 다음 해인 1876년, 그의 부친 영규가 생원시에 응시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과거에 얼마나 집착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아들이 이미 과거에 합격해 관직으로 진출했음에도 아버지가 과거의 첫 관문인 생원시에 도전한 것이다.

생원시는 초시와 회시 두 단계로 나누어 진행된다. 1876년 당시 63세의 안영규는 생원 초시에서 입격했으나, 회시에서는 탈락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6년 뒤인 1882년, 안영규는 다시 생원시에 도전했으나, 이번에도 초시만 통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운강장에는 1876년과 1882년의 시권이 각각 한 장씩 남아 있는데, 안영규가 생원시에 입격했다는 백패는 남아 있지 않다. 생원·진사시의 합격자 명단을 묶은 『사마방목』에도 순흥안씨 족보에도 입격 기록이 없다.

안영규의 시권 2장에는 할봉(割封)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답안과 피봉 사이에 위 1곳 아래 2곳에 자표를 매기고, 채점 전에 위 1곳의 자표는 가운데를 자르고 아래 2곳의 자표는 그 사이를 잘라 채점 후에 맞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보통 할봉법은 1873년(고종 10)에 폐지됐다고 알려져 있으나, 1882년까지도 여전히 할봉제가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주목된다.

안영규 1876년 생원 초시 시권
안영규 1876년 생원 초시 시권
안영규 1872년 생원 초시 시권
안영규 1872년 생원 초시 시권

안창범의 아들인 안기묵이 1886년에 생원시에 응시한 시권도 한 점 남아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부분은 시권의 오른쪽 인적사항이다. 사조(四祖) 중 부(父), 조(祖), 증조(曾祖)의 품계와 관직이 적혀 있다. 특히 ‘부통훈대부전행사헌부지평 창범(父通訓大夫前行司憲府持平 昌範)’을 통해 아버지 안창범의 벼슬이 정5품의 사헌부 지평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운강장에는 1883년에 안창범이 통훈대부 사헌부 지평에 임명된 교지가 있다.
지금까지 운강장 시권의 겉 형식만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속 내용은 다음 기회를 약속한다. 

아무튼, 조선이 ‘공정한’ 과거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고자 노력한 것을 운강장에 남아 있는 시권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젊은 교육 도시를 지향하는 광양시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소중한 역사 자료가 우리 곁에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자료를 전시할 시립박물관은커녕 아직 시 문화재 지정도 못 받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다.

안기묵의 1886년 생원 초시 시권
안기묵의 1886년 생원 초시 시권

제공=이은철 광양지역史연구회 ‘마로희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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