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제공=이은철 광양지역史연구회 ‘마로희양’ 대표 

며칠 전 구례향교에서 김평부 대금 명인의 공연을 보았다. 뒤풀이 자리에서 막걸리 한 사발에 흥이 오른 참석자들의 요청으로 김평부 명인은 북이 아닌 기타를 잡고 이원규 시인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을 불렀다. 안치환의 노래에 익숙한 필자에게는 너무나 신박한 버전이었다. 그 음색과 멜로디에 압도당해 지금도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 이번 글의 제목마저도 ‘행여 마로산성에 오시려거든’으로 정했다. 이원규 시인에게 양해를 구한다.

마로산성 전경
마로산성 전경

광양의 첫 이름, 마로(馬老)는 무슨 뜻일까?
모두가 아는 것처럼, 광양의 백제 때 이름은 ‘마로’였다. 하지만 ‘마로’의 의미는 누구도 정확히 모른 채, 여러 가지 주장들만 난무한다. 

광양역사문화관의 전시물에는 ‘마로는 우두머리’라는 뜻이라고 설명돼 있다. 근거 제시는 없다. 아마 광양이 최고의 고을이라는 희망을 담아 ‘우두머리’라 추정하고, 그 뒷글자 ‘머리’가 ‘마로’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해석한 것 같다. 

『삼국사기』제36권 잡지 제5조, ‘마로현에서 희양현으로’의 지명 변천에 관한 기록
『삼국사기』제36권 잡지 제5조, ‘마로현에서 희양현으로’의 지명 변천에 관한 기록

누군가는 백제 때 마서량(옥구) 및 마사량(장흥)과 같이 ‘밝은 땅’이란 의미로 ‘마로’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마서량, 마사량, 마로가 동일한 ‘밝은 땅’의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의아할 뿐이다. 

필자는 순수 우리말인 ‘마루’를 한문으로 음차(音借)해 ‘마로(馬老)’로 기록했다고 생각한다. 이 역시 필자의 소설(小說)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 허구적인 이야기를 꾸며낸 변명을 너절하게 풀어놓고자 한다.
음차란 한글이 없던 시절에 한자의 음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식이다. ‘마루’와 비슷한 음을 가진 한자 중 쉽고 친근한 馬와 老를 사용해 기록한 것이다. 馬老를 ‘말이 늙다’ 또는 ‘늙은 말’ 등의 뜻으로 풀면 안 된다는 얘기다.

이 지점에서 왜 광양을 ‘마루’라고 이름했는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이에 대한 해답은 고대의 섬진강 주변 상황을 들여다보면 된다. 6세기가 막 시작될 무렵, 백제는 가야의 영향권 하에 있던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백제가 가장 먼저 점령한 지역이 현재의 광양이었고, 그곳에 바로 ‘마로산성’을 축성했다. 광양은 섬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군사적인 요충지였던 만큼 관청을 산성 안에, 즉 ‘(산)마루’ 위에 두었다.

마로산성은 단순한 군사시설이 아닌 백제가 전남동부 지역을 다스리기 위한 행정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이곳을 ‘마루’라 부르고 馬老라 적었던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부디 사실에 가깝길 바랄 뿐이다. 

순천대학교 박물관 고고역사실에 전시 중인 마로산성 출토 수막새 기와
순천대학교 박물관 고고역사실에 전시 중인 마로산성 출토 수막새 기와

마로관 명문 기와는 지금 어디에?
광양의 백제 때 지명이 ‘마로’였음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냐는 질문이 예상된다. 마로산성에서 출토된 유물로 대답할 수 있다. 2000년대 초반 순천대 박물관에서 5차례에 걸쳐 마로산성을 발굴했을 때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중 ‘마로관(馬老官)’이라는 명문이 양각된 기와가 여러 점 출토됐다. 단순히 ‘馬老’ 지명만이 아닌 관청이 있었음을 입증해 주는 ‘官’ 자가 함께 새겨진 암키와들이었다.

또한 『삼국사기』 제36권 잡지 제5조에 ‘마로현에서 희양현으로’의 지명 변천에 관한 기록이 있다. 조금 길지만 인용해 보면 “승평군은 본래 백제의 삽평군을 경덕왕이 개명했는데, 지금도 그대로다(또는 승주라고도 함). 그 영현은 셋으로, 해읍현은 본래 백제의 원촌현을 경덕왕이 개명했는데, 지금은 여수현이고, 희양현은 본래 백제의 마로현을 경덕왕이 개명했는데, 지금의 광양현이고, 여산현은 본래 백제의 돌산현을 경덕왕이 개명했는데, 지금은 다시 옛날 그대로다.”라고 기록돼 있다. 

순천대학교 박물관 고고역사실에 전시 중인 마로산성 출토 마로관(馬老官) 명문 기와
순천대학교 박물관 고고역사실에 전시 중인 마로산성 출토 마로관(馬老官) 명문 기와

이로써 백제 때 광양의 지명이 ‘마로’임은 유물로도 역사 기록으로도 교차 입증이 된다. 이런 경우를 흔히 ‘빼박’,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라 한다. 이렇게 중요한 광양의 첫 지명이 기록된 ‘마로관’ 명문 기와는 현재 어디에 있을까?

마로산성의 발굴 기관인 순천대학교 박물관이 소장 전시하고 있다.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는 마로산성 출토 유물 전시에 특별 코너를 마련하고 있다. 고고역사실 가운데에 별도의 세트를 마련해 마로산성 수막새기와 30여점과 마로관 명문기와 7점을 전시하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마로관’ 명문 기와는 광양에 살았던 옛사람들이 직접 새긴 진정한 의미의 광양 역사 기록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물을 타 기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을 기꺼이 참아내고 있는 현재의 광양에 사는 우리가 역사를 말할 자격이 있는지, 필자부터 반성 또 반성한다.

마로산성 출토 마로관(馬老官) 명문 기와 확대
마로산성 출토 마로관(馬老官) 명문 기와 확대

마로에서 희양으로, 희양에서 광양으로
존재하는 유무형의 모든 것은 변한다. 세상에 비길 데 없는 유일한 진리다. 광양의 지명도 시대에 따라 변천을 거듭한다. 
백제 때 마로로 불리던 지명은 8세기 중엽 경덕왕의 한화정책으로 중국식으로 바뀌었다. 앞서 『삼국사기』 기록에서 확인한 것처럼, 이때 마로가 희양(晞陽)으로 개칭됐다. 

필자의 단견으로는 마로와 달리 이번에는 음차가 아닌 훈차(訓借), 즉 한자의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한 것으로 여겨진다. ‘마로’와 발음이 비슷한 ‘(젖은 것이 햇빛에) 마르다’라는 뜻을 가진 희(晞)를 사용한 것이다. 양(陽)은 남수북산(南水北山) 지역에 양을 붙이는 중국식 법칙을 따른 것이다. 흔히, 광양이 따뜻한 고장이어서 ‘양(陽)’을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한양(漢陽)과 평양(平陽)의 ‘양(陽)’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희양이란 지명은 고려 태조 23년(940)에 지방 명칭을 전면적으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광양(光陽)’으로 바뀌었다. 희(晞)는 ‘마르다’와 동시에 ‘햇빛’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이번에는 ‘햇빛’이라는 의미를 강조해 ‘광(光)’으로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광양이란 지명이 태어난 지 어언 1100년이 돼간다. 우리는 진정 유구한 역사의 고장에 살고 있다는 자긍심으로, 이원규 시인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을 변용해 독자 여러분께 부탁드린다.

“진실로 광양에 오시려거든/마로산성의 성돌처럼 겸허하게 오고/툭하면 역사를 기망하는 이는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광양 태초의 고갱이를 보고 싶다면/마로산성 기와를 보러 순천대 박물관으로 가시고/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제공=이은철 광양지역史연구회 ‘마로희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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