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너무 몰랐다. 제주 4·3과 여순항쟁에 대한 도올 김용옥의 책 제목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만 하는, 그런데 알아서는 아니 될 것으로 저주당한 우리 현대사의 아픈 실상을 담아낸 책이다. 해방정국에 대해 우리가 너무 모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불편한 진실을 가리려는 부당한 권력이 있었기 때문임을 도올 특유의 통쾌한 필체로 밝히고 있다. 필독을 권한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모르는 것이 현대사뿐일까? 그 이유가 모두 권력 때문일까? 필자의 생각에는 우리는 대부분의 역사를 모른다. 권력의 엉큼하고 불순한 의도 만큼이나 우리의 무관심과 무지의 탓도 크다. 그 예로 ‘돈탁이’를 들고 싶다.

진월면 오사리 돈탁마을 출신, 돈탁이
광양에 사는 우리 중에 ‘돈탁이’를 아는 분이 몇이나 될까? 이렇게 질문하는 필자도 지난해 12월에야 ‘돈탁이’를 처음 알았다. 문화재청에서 주관한 「조선 시대 국난극복의 통신유적 ‘봉수’」 학술대회를 어쩌다 참관했는데, 뒤풀이 자리에서 목포대박물관 학예사와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것이 계기였다. 

처음 만난 어색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2011년 목포대박물관에서 발굴한 진월면 오사리 돈탁패총 이야기를 꺼냈더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학예사가 ‘돈탁이’를 아는지 물어왔다. 나름 광양 지역사를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돈탁이가 누구예요?”
“돈탁이는 오사리 돈탁패총에서 발굴된 개 유골 주인공의 이름입니다.”

011년 진월면 오사리 돈탁패총에서 출토된 ‘돈탁이’ 유골      제공=목포대박물관
011년 진월면 오사리 돈탁패총에서 출토된 ‘돈탁이’ 유골 제공=목포대박물관

그 순간의 전율은 지금도 생생하다. 돈탁패총에서 체고 50cm 정도인 중대형 크기의 개 유골이 밀집된 완전한 1개체 상태로 출토됐으며, 이로 보아 식용이 아닌 제의용으로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특히 개 유체에서는 음경골도 확인돼 수컷임을 알 수 있었단다. 결국 돈탁이는 2011년 오사리 돈탁패총에서 발굴된 개 유골에 목포대박물관에서 붙여준 수컷 개의 이름이었다.

2021년 창원대박물관의 ‘패총에 묻힌 개, 사람 곁으로 오다’ 특별전의 포스터 가운데에 ‘돈탁이’가 자리잡고 있다.
2021년 창원대박물관의 ‘패총에 묻힌 개, 사람 곁으로 오다’ 특별전의 포스터 가운데에 ‘돈탁이’가 자리잡고 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목포대박물관 덕분에 환생한 돈탁이는 전국 유람을 시작했단다. 2020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대학박물관협회가 주관한 ‘조개와 사람의 사간, 패총에 묻다’ 특별전에서 ‘인간의 가장 가까운 친구, 개’ 부스의 주인공이 바로 돈탁이였다. 2021년 가을에는 창원대박물관이 주관한 ‘패총에 묻힌 개, 사람곁으로 오다’라는 주제의 영호남 학술교류 특별전 포스터의 주인공이 됐다. 그야말로 개 발에 땀이 나도록 맹활 하고 있었다.

최고의 타임캡슐, 패총
필자는 2011년 발굴 당시 여러 번 현장도 방문하고 목포대박물관에서 발간한 돈탁패총 발굴보고서를 정독하며 관련 글도 썼지만 돈탁이를 주목하지 못했다. 조선 정조 때의 문장가 유한준(1732~1811)이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음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필자는 돈탁이에 대한 앎과 사랑이 부족하여 제대로 보지 못하고, 보고서를 한갓 모으기만 했던 것이다. 참으로 창피하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은 한 가지 의문이 생겼을 것이다. 어떻게 돈탁패총은 역사의 무덤이라는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돈탁이’ 유골을 후세에 전해줄 수 있었을까? 비결은 바로 패총(조개더미)이다. 패총을 이루는 수많은 조개에는 뼈 유물 보존에 유리한 성분인 석회석(CaCO3, 탄산칼슘)이 풍부하기 때문에 보통 다른 유적에서는 썩어버리는 동물 뼈, 탄화된 식물 유체 같은 유기질이 잘 남게 된다. 그래서 패총은 그 시대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최고의 타임캡슐이다.

잠깐 돈탁패총의 발굴 과정을 살펴보면, 섬진강 변 해발 10~15M 언덕 위에 있는 오사리 돈탁마을의 패총은 1983년 지표조사를 통해 처음 발견됐다. 당시 숫돌과 빗살무늬토기 조각 등이 발견되면서 신석기시대 패총으로 주목받았다. 이 유적을 2011년 1월부터 2월까지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약 30일간 발굴 조사했다. 

2011년 1월 목포대박물관의 돈탁패총 발굴 장면
2011년 1월 목포대박물관의 돈탁패총 발굴 장면

돈탁패총의 발굴 결과 유적의 상층부는 과수원 조성 등의 이유로 많이 교란된 상태였으나, 다행히 하층부는 원형이 잘 보존돼 있었다. 출토 유물로는 기원전 3천년~기원전 2천년 시기로 추정되는 여러 토기 조각과 갈돌 1점, 사슴과 개의 동물 뼈 등이 있었다. 그 동물 뼈 중 완전한 상태로 발굴된 1개체의 개 유골이 돈탁이였다. 

조개더미의 주인공에 해당하는 조개류로는 강굴, 참굴, 꼬막, 백합 등이 수없이 출토됐으며 가끔은 피뿔고둥도 나왔다. 이 중 강굴은 광양에서는 벚꽃이 피는 시절에 많이 잡힌다고 해서 벚굴로 불린다. 요즘도 섬진강에 하얀 벚꽃이 만개하는 이른 봄이 되면 벚굴이 전국의 식도락가를 불러 모으는데, 지금부터 4~5천년 전의 신석기 사람들도 섬진강 자락에서 벚굴을 까먹었다니 신기하다. 어른 손바닥만 한 벚굴을 모닥불에 구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때 담백한 향내와 함께 먹는 재미를 시대를 초월해 공유했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신석기 사람과 돈탁이가 바로 곁에 있는 친구처럼 느껴진다.

정말 우린 너무 몰랐다
돈탁패총이 있는 섬진강변의 야트막한 언덕은 실은 돈탁마을의 주산이다. 이 산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정확하게 거북이가 섬진강으로 머리를 입수하고 있는 모양이다. 신석기시대 이곳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 거북 모양의 산에 기대어 차가운 북서풍을 피하면서 조개를 잡아먹고 돈탁이와 더불어 살았던 그곳에 지금까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광양제철고 학생들의 돈탁마을 ‘거북등 터널’ 답사(2019년 6월 12일)
광양제철고 학생들의 돈탁마을 ‘거북등 터널’ 답사(2019년 6월 12일)

그런데, 최근 이 거북산에 위기가 닥쳤다. 2013년 섬진강 자전거길을 조성할 때 거북산의 목이 잘릴 위기에 처했지만, 돈탁마을 주민들의 노력으로 거북산에 터널을 조성하는 것으로 겨우 위기를 면했다. 현재 돈탁마을에 가면 ‘거북등 터널’을 지나는 라이더를 볼 수 있다.

여담으로 돈탁마을은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마을이다. 역사교사가 된 이후 30여 년간 전국으로 세계로 답사를 다니면서 찾아낸 내 인생 최고의 마을이다. 그래서 5년 전 심신이 극도로 힘들었을 때 찾아간 곳이 바로 돈탁마을이었다. 그곳에 아궁이가 있는 작은 월세방 하나를 구했는데, 어느 날 돈탁패총을 발굴한 현장의 매실밭에서 주인 아주머니를 만났다. 나와 돈탁마을의 인연을 맺어준 그 패총의 소유주가 바로 주인 아주머니였던 것이다. 역사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더니, 이 얼마나 기막힌 인연인가. 

진월면 오사리 돈탁마을 전경, 사진 가운데 부분 언덕에 돈탁패총이 있다.
진월면 오사리 돈탁마을 전경, 사진 가운데 부분 언덕에 돈탁패총이 있다.

이처럼 필자는 일찍부터 돈탁마을의 패총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도 하고 심지어 좋은 쉼터도 마련했지만, 정작 패총에서 발굴된 돈탁이는 몰랐다. 필자뿐 아니라 광양 사람 거의 전부는 돈탁이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정말 우린 너무 몰랐다.

행여 돈탁이를 바로 광양으로 데려오고 싶은 분이 계시더라도 참아야 한다. 5천 살이 넘은 돈탁이에게 필요한 건 ‘개집’이 아닌 ‘시립박물관’이다. 시립박물관 건립의 그 날까지는 돈탁이를 곁에 두고 보고 싶어도 제발 참아야 한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돈탁이를 발굴하고,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 정성으로 보호해 주고 있는 목포대학교 박물관에 무한감사를 드린다. 
제공=이은철 광양지역史연구회 ‘마로희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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