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전과자다. 죄를 지어 감옥에 다녀온 전과자(前科者)가 아닌, 전공을 바꾼 전과자(轉科者)이다. 1984년 당시 최첨단과학으로 주목받던 유전공학과에 진학했다,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역사교육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그런 연유로 필자의 옛 친구 중엔 유전공학 박사가 몇 명 있는데 그중 한 절친과 관련된 이야기다.

유전공학 박사도 고인돌은 모른다
2000년대 초반 4월 어느 일요일 아침에 유전공학 박사인 절친의 부친상 전화를 받았다. 당시엔 장례식장이 아닌 집에서 초상을 치르던 때였다. 절친의 고향은 경북 청도였다. 복사꽃 필 무렵의 청도의 풍경은 가히 환상이었다. 제법 고택의 분위기가 나는 절친의 집에 도착하여 빈소에 예를 갖추고, 먼저 도착한 친구들과 마당 멍석 위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정원 한 편의 유달리 큰 바위가 눈에 띄었고, 바위 아래를 살펴보니 고임돌이 보였다. 분명 고인돌이었다.

고인돌은 떼로 존재한다. 눈을 사방으로 돌려보니 장독대 옆에도 담장 옆에도 천연덕스럽게 큰 바위가 자리하고 있었다. 앉은 자리에서도 대여섯 개의 고인돌이 보였다. 너무 신기하고 또 궁금했다. 절친은 과연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마침 상주인 절친이 문상객이 뜸한 틈에 우리 자리로 왔다. 천붕지통의 고통을 겪고 있는 상주이지만,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바로 절친 옆구리를 찔러 보았다. “너 저 바위가 뭔지 아냐?”, “몰라! 나 어릴 때부터 있었는데, 집 뒤 대나무 숲 속에도 저런 바위가 많아 올라앉아 놀았었지!”

생명의 근원인 DNA를 다루는 유전공학 박사도 제집의 고인돌은 몰랐다. 이와 관련된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다. <무소유>를 소유하였던 법정 스님이 합천 해인사에 머무를 때, 보살 한 분이 장경판전 앞을 지나면서 스님께 물었다. “스님, 팔만대장경이 어디 있습니까?”, “방금 지나오지 않으셨나요?”, “아, 그 빨래판처럼 생긴 거 말인가요?” 이 일화를 패러디한 『팔만대장경도 모르면 빨래판이다』라는 제목의 역사책이 있었다. 이어서 『빨래판도 잘 보면 팔만대장경이다』도 출판되었다. 국보급 문화재도 모르면 흔하디흔한 물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고인돌도 모르면 정원석이고, 정원석도 잘 보면 고인돌이다.

옥룡면 민가 마당의 고인돌
옥룡면 민가 마당의 고인돌
옥룡면 민가 안채 옆의 고인돌
옥룡면 민가 안채 옆의 고인돌
옥룡면 민가 담장의 고인돌
옥룡면 민가 담장의 고인돌

광양에도 유사한 예가 있다. 고인돌이 농가의 마당 한가운데 또는 안채 옆 정원석이 되기도 하고, 담장의 일부분을 이루기도 하고, 산소 옆에 지킴이 역할도 한다. 3천 년 전부터 한반도 전역에 수많은 고인돌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이후 우리 선조들의 삶은 늘 고인돌과 함께였다. 단, 그 대부분의 시기에 고인돌이 청동기시대의 무덤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광양에도 300여 개의 고인돌이 있다
현재 광양에 300여 개의 고인돌이 남아 있다. 광양의 고인돌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75년 『전남고고학지명표』에 광양읍 덕례리 고인돌 11기가 소개되면서부터이다. 이후 1990년 남해고속도로 건설 때 전남대학교박물관이 「옥곡면 원월리 고인돌」을 발굴조사하면서 구체적 성격을 파악했다. 1999~2000년에는 광양 용강리 택지를 개발하면서 순천대학교박물관이 「용강리 기두 고인돌」을 발굴하여 많은 유물과 고인돌의 다양한 하부구조를 확인했다. 이처럼 학계에서 광양의 고인돌을 확인하고 조사한 것이 겨우 50년 남짓이니, 일반인들이 어찌 고인돌과 정원석을 구분할 수 있었겠는가?

최근 광양에 사는 우리가 고인돌에 관심을 가져야 할 분명한 이유를 찾은 조사가 있었다. 2021년 9월부터 2022년 2월 사이에 (재)마한문화연구원(원장 조근우)이 광양시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에 대한 전체 현황조사를 했다. 이 조사를 통해 광양지역의 고인돌은 원래 45개 군 296기가 분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일부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거나, 훼손․유실되어 2022년 2월 현존하고 있는 고인돌의 숫자는 총 39개 군 256기로 파악되었다. 고인돌 40여 개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유는 발굴조사와 우리의 관리 부실이었다. 둘 다 심각한 문제다.

용강리 기두 유적 출토 돌칼과 돌화살촉
용강리 기두 유적 출토 돌칼과 돌화살촉

먼저 도로공사와 택지개발 등의 이유로 발굴조사는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발굴조사를 하고 원형보존이 어려울 경우는 당연히 이전 복원하여야 한다. 마땅히 이전할 곳이 없는 경우에는 시립박물관 야외전시실로 옮기면 되지만, 우리에겐 시립박물관이 없다. 그러니, 광양의 고인돌은 발굴과 동시에 사라지는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다행히도 광양에서는 고인돌 발굴 후 이전 복원을 하고 있지만,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다. 시립박물관 건립으로 체계적인 관리를 해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의 관심 부족으로 훼손되고 유실되는 문제는 굳이 거론하지 않겠다.

명암마을 고인돌 채석장을 발견하다
필자는 지난 20년 동안 다양한 답사객들과 함께 광양의 고인돌 현장을 찾았다. 봉강면 명암마을 들판의 잘 생긴 고인돌, 옥룡면 남정마을 산자락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산소 지킴이 고인돌, 옥룡면 하평마을의 주민들과 더불어 사는 정겨운 고인돌을 답사하면 모두가 놀란다, 우리 곁에 이렇게 많은 고인돌이 있다는 사실에.

그러나 늘 두 가지 아쉬움이 있었는데 하나는 고인돌 채석장이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광양의 고인돌에서 출토된 유물을 직접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 채석장의 아쉬움은 한 방에 날릴 수 있었다. 앞서 이야기한 2022년 (재)마한문화연구원에서 조사하고 광양문화원에서 발간한『광양의 고인돌』을 보면, 봉강면 석사리 명암마을에서 고인돌 채석장 1곳이 발견되었다. 명암마을 남쪽 해발 50~85m 사이에 거대한 암반층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채석을 위한 쐐기 흔적과 고인돌 상석으로 사용하기 위해 채취하여 놓은 석재도 확인되었다. 채석장 북서쪽으로 약 700m 떨어진 곳에 있는 석사리 명암 고인돌군에서 채석장이 잘 보인다.

명암마을 고인돌과 채석장(붉은색 동그라미 부분)
명암마을 고인돌과 채석장(붉은색 동그라미 부분)

이처럼 광양 명암마을 고인돌의 상석을 채석한 것으로 추정되는 암반이 확인되었다는 점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거대한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며,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경제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노동력과 경제력은 고인돌 상석 채석장과의 거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번 고인돌 채석장의 발견으로 당시 고인돌을 축조한 집단의 규모와 정치적 성격을 규명해 내는 계기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명암마을 채석장 전경
명암마을 채석장 전경

안타까운 점은 아직 명암마을 고인돌 채석장 답사를 위한 통행로도 없고 안내판도 없다. 대다수는 고인돌 채석장 발견 사실 자체를 모른다. 지금까지 전남지역에서 고인돌 채석장이 확인된 예는 화순 효산리와 나주 운곡동 두 군데이다. 명암마을 고인돌 채석장 발견은 전남에서 세 번째 사례이다. 고인돌 채석장도 모르면 그냥 바위덩이지만, 바위덩이도 잘 보면 고인돌 채석장이다. 광양의 또 다른 채석장 발견을 위해서라도 적극 홍보하여야 한다. 

명암마을 채석장 쐐기 흔적
명암마을 채석장 쐐기 흔적

명암마을 고인돌 채석장 발견으로 한 가지 아쉬움은 달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광양 고인돌에서 발견된 유물을 직접 보기는 힘들다. 고인돌 답사는 박물관의 멋진 전시실에서 고인돌 출토 유물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여야 한다. 1990년 옥곡면 원월리, 1999년 용강리 기두, 2010년 지원리 창촌 유적의 고인돌에서 출토된 각종 돌칼, 숫돌, 토기 등을 광양시립박물관에서 확인하기 전까지는, 광양의 고인돌 답사는 미완의 답사이다.

제공=이은철 광양지역史연구회 ‘마로희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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